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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영화속 주인공은 아나키스트이다.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 오후

오후 작가는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썼다. 나는 올해 가을과 겨울 리디북스 셀렉트로 두 권을 읽었다. 정확하게는 TTS 기능으로 오디오북처럼 들었다. 점심시간에 걷기를 하면서 40분 정도 듣는데 빠짐없이 듣게 되면 한 달에 4~6권 정도를 듣게 된다. 

중요한 부분을 다시 읽거나, 천천히 음미할 수는 없지만, 책의 흐름을 파악을 위해서라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이 잘 될 때도 있다. 밑줄을 치거나 메모를 하기는 어렵지만,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해당 부위에 형광펜 표시를 해둘 수도 있다. 형광펜이 번거롭고, 옮겨 쓰는 효과는 없기 때문에, 종이책에 비해 정보 습득력은 떨어진다.

오후 작가의 책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리디북스 셀렉트 추천으로 올라왔다.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다. 마약에 대해 거의 모르기 때문에 한번 정도 읽어볼 만하다고 느꼈다. 마약을 크게 나눈다면 '흥분제'와 '억제제'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마초보다 담배가 더 위험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다는 작가의 이야기도 들었다.

오후 작가의 글은 읽는(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른 책을 찾아보니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라는 책이 있었다. 제목으로는 재미없을 것 같았지만, 내겐 더 좋았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과 발명, 그리고 발전에 따른 에피소드였는데, 솔직한 작가의 관점이 통통 튀는 글솜씨로 흥미를 더했다. 

그렇게 오후 작가는 내 머릿속의 즐겨찾기에 저장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되었다고 들었다. 리디북스 셀렉트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냥 YES24에서 종이책을 구매했는데, 정작 읽는 것은 오래 걸렸다. 맛있는 간식을 오랫동안 두고 먹는 느낌이었다. 다른 일로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작가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 아나키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 - 라고 한다. 사실 나는 아나키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가는 헷갈리기 쉬운 개념 정리를 해주었다.

P005
"아나키즘과 무정부주의는 다른 개념입니다. 무정부 상태를 의미하는 아나키와, 아나키즘은 둘 다 지도자가 없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에서 유래했지만 같은 뜻은 아니죠.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지배에 대한 저항,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의미합니다."

소개한 11편의 영화 제목 중에 내가 본 영화는 2편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공감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영화를 소재로 했을까?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주인공은 대다수 이상적인 캐릭터인데, 그 주인공이 선을 넘는다는 것은 어떤 맥락일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을 잠시 잊고 다른 생각을 해본다는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주인공)이 되어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껴보고,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통념을 극복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 보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현실로 돌아오면 된다.

P023
결국, 영화란 겪어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캐릭터를 던져서 캐릭터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도 주인공과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일상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다.

나는 그냥 재미있게 본 '히든 피겨스'를 보고 약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에서는 용감한 흑인 여성들을 칭송하였지만, 작가는 그런 영화는 오히려 현실에서도 '개천 용'이 언제라도 가능한 것처럼 우리를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에서 60년대에 태어나 자란 남자인 나는 저런 약자의 고민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빈부의 불만은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극복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성별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공감을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다.

P032
'개천 용' 서사는 차별받는 주인공을 보면서 분노하게도 하지만, 주인공의 성공을 통해 은연중에 '체제 순응을 강조한다. 이런 영화를 몇 편 떠올려보라. 차별받는 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주류에 편입되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산 사람일수록 성공에 대한 욕망이 크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이 "부자들보다 돈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는 사회 계층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P033
현실에서 소수자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갑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성공 가능성도 낮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가 자신의 문제를 알아봐 준다면, 모든 문제가 손쉽게 해결된다.

P040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는 외모였고, 이런 문화에서 자란 여성은 치장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외출 전 남녀의 준비 시간을 비교해보면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 시간이 평생 쌓인다고 생각해보라. 안 꾸미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안 꾸미면 된다. 하지만 꾸미지 않았을 때 입는 타격은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크다. '시간은 공평하다'는 말만큼 헛소리도 없다.

P055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중략)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 결과가 평등하지 않은데, 기회가 평등했을까? 한 번의 경쟁이라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평등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 평균을 놓고 봤을 때, 집단 간의 평균은 비슷해야 한다.

P057
이 불쾌감은 우리끼리라도 서로 위로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어느 쪽이든 정체성에 묶인 생각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는 사람은 타지에 사는 사람들이다. (중략)
왜 나는 나를 정의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개인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어떤 특정 조건으로 불편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의 주류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개인, 어쩌고 하면서 자랑스레 떠들 수 있었던 거다.

무명들의 영화라고 하는 스타워즈 : 로그원도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좀 소박했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감을 느꼈던 영화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지만, 촛불시위 때의 시민들의 모습과 오버랩하면서 찰나와 순간의 열정과 영원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정의를 내린다.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80년대나, 촛불 때나 다르지만 똑같다.

P077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은 지금 온전히 나를 너에게 100퍼센트 쏟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네가 나의 전부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한 것이 된다. 사랑의 희열로 가득 찬 순간은 한순간이지만, 그 희열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 영원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의미 있고, 달콤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실패하지만, 끊임없이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단순히 연애만 그런 것이 아니다.

P078
입으로는 "위대한 혁명"이라고 말해도, 뒤로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은, 생판 모르는 이들과 연대한 그 순간만은, 참이 거짓을 이기고 진실이 승리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설혹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순간만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 그 순간은 찰나지만 영원하다.

그리고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마음속에 와 닿은 몇 가지 글들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발췌해둔다.

P085
우리가 비판할 지점은 나라를 팔아먹어서가 아니라 강한 힘에 압도되어 파시스트 제국주의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친일 부역자들 중 상당수는 이후 더 강한 세력(미국과 군부)에게 아부하며 살아남았다. 그들은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한 것을 동경한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는 똑같은 맥락에서 과도한 애국자들도 비판할 수 있다. 친일을 했던 사람이나 과도한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체제를 옹호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P095
순응하는 삶에도 숭고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이 중 몇몇은 이탁오가 느낀 것처럼 자신의 삶이 비루하고 개 같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대개는 자신의 행동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며 넘겨버린다. 이탁오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의 삶은 나를 포함해 지금 개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이제까지가 아니라 앞으로 개같이 살지 않으면 된다는 위로. 세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삶은 바꿀 수 있다는 위로.

P102
팡 부인처럼 말도 할 수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는 극단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정정하다'라고 말하는 노인들조차 하루의 많은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낸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노인의 자살률은 다른 세대보다 압도적으로 높은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평했다. "노년의 비극은 그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는 것"이라고. 우리 사회가 노년의 문제를 직시하려면 그들의 침묵을 직시해야 한다.

P139
암호화폐가 현실화되면 누가 얼마만큼의 수익을 어떤 방식으로 냈는지 불명확해진다. 즉, 세금을 거둬들이기 힘들다. 세금을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하면 국가의 역할을 축소되고 자본은 통제를 벗어난다. 수갑을 차지 않으면, 자본권력이 국가권력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런 식의 불균형이 지속되면 암호화폐는 기존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다.

P174
아나키스트의 1원칙은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든 국가든 경제든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그곳에 속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속해야 한다면 그 권위를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P185
마나나 : 남편이 붙잡지 않았어?
학생 : (잠시 생각하더니) 선생님, 하나만 말할게요. 거절할 거면 진심으로 해야 해요.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지 말고요. 많은 여자애들이 애인한테 헤어지자고 하지만, 다시 만나요. 한번 말하면 그대로 해야 해요. 그게 제 의견이에요.

P194 (김영란 법)
그러니까 이 법을 만든 사람에게 중요한 건 벤츠검사가 아니었다. 기존의 뇌물방지법이 뇌물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법이라면, 이 법은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인 셈이다. '소수자의 대법관'이란 별명이 과장이 아니구나 싶었다.

P241
왜 노조 참여가 중요한가? 왜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가? 우리 사회의 법은 정의가 아니라 힘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리지 않으려면 세력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힘에 좌우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힘이 충돌해야만 그나마 힘의 균형이 생겨날 수 있다. 피곤하다. 법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글의 맨 마지막에서야 선을 넘자는 이야기를 다시 한다.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누웠던 우리들(나)의 삶이 있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주인공으로 바뀔 수 있고, 다른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감독이니까.

P277
사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가끔은 굴복하는지도 모른 채 굴복한다. 김수영 시인이 <풀>에서 말하듯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니겠는가. 가끔 비굴한 자신이 처량하지만, '인생이 다 그런 거지' 하며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복종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어제 굴복했다고 해서, 오늘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굴복한다고 해서, 내일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 굴복한다고 해서, 평생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목소리를 내야 할 순간에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본모습을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당신의 인생에 당연한 건 없다.
선을 넘자.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