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대화를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서 ‘도덕적 고려가 필요한 광범위한 존재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어떻게 서로를 돌볼 것인가?’로 전환해야 합니다. - 마이클 레빈
이 책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리터러시(문해력이라 쓰고, 이해력/지능이라고 생각하는)에 대한 책인데, 마치 내 지능(이해력)을 시험보는 듯한 책이었다.
도데체 나는 인공지능의 원리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한참을 앞서가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뭔가 특출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도덕적 고려'가 필요한 '광범위한 존재'들과 함께, 어떻게 '서로를 돌볼것'인가?라는 말은 도데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SW 패키지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인가? 마치 법인(주식회사)에 무언가 인격을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가는 인공지능에 대한 분석은 내가 바라본 방향과 프레임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상도 낮은 카메라로 높은 배율의 망원렌즈를 사용하는 사진 작가의 대상을 같이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여 글쓰기에도 활용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일단 인공지능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부 기능을 잘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자료 수집과 사실확인 등이 일차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단 작가가 걱정하는 창작의 대체재로서 작동을 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것과 책을 쓴다는 것이 많이 다른 것이고, 자료를 작성하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은 역시 다른 것이 아닐까 한다.
자신이 쓴 글은 부족할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반영된 것이지, 인공지능에서 생성된 글은 자신의 글로 만들기에는 SW 빠진 HW 같은 느낌이다. 학생들이 GPT를 이용하여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은 좀 다른 영역일 것이고..
‘이젠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다’라고 선언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요. 프롬프트는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의도와 목적·단락의 흐름·이전 결과물에 대한 비판적 독해·필자의 세계관 등등이 모두 엮여 하나의 프롬프트로 ‘응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호들갑’의 주역들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가르치는 것으로 쓰기 교수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위의 시뮬레이션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롬프트는 일련의 진술이나 원리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프롬프트는 맥락에 따라 동적으로 변화합니다. 권력과 배경지식·글의 지향·창작자의 세계관 및 해당 영역에서의 전문성·생성형 인공지능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집니다. 그렇게 얻은 텍스트 또한 필자의 의도와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 이제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도 필요없어진 것 같다. 그냥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되도록 상세하게 던지면 배경,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꽤 괜찮은 대답을 제시한다. 기술은 점점 사람을 향해 발달하고 있다.
우리가 GPT를 사용하는 능력도 발전하지만, SW도 우리 사람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개인화 도구도 되면서, 다른 SW의 장점과 결합중이다. 리터러시 측면은 중요하지만, 내게는 아직 유용한 검색도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 온라인 친구분 하나가 거래처인 건설사 임원분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실시간으로 상대의 정보와 구사하는 용어와 발언을 해석해달라고 했더니 바로 대답을 해줘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책만을 읽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를 통해 정보와 지식, 감동을 받기도 한다.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그들은 원작의 풍부하고 세밀한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지는 못하지만, 나름 그 영화를 즐길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산티아고 길을 체험하는 것은 요약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취향에 맞춰 한달짜리, 이주일, 일주일, 3일짜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다. 경험의 정도와 감동은 다르지만 산티아고 순례 목적은 모두 달성하는 것이다.
책과 활자에 푹 파묻혀 사는 사람들은 그 세계의 섬세함과 오묘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현대의 범인들은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공유한다. 물론 SNS에도 공유하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하고, 물론 일도 열심히 하고, 돈도 아끼면서 모아야 한다.
리터러시라는 삶의 중요한 측면도 있지만, 아직 내게는 인공지능 자체도, 리터러시 자체도 버겁다. 새로운 인공지능이 몇달에 한번씩 나오더니, 이제는 한달에 몇개씩 나오고 있다. 기능을 익히지도 못한다. 아니 어떤 것이 나왔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면서 리터러시와 기계를 포함한 포괄적인 존재에 대해 가치관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다시 독촉을 받고 있다. 이 세상을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적응하기도 정말 힘들다.
다음주 분당성장판 독서모임에서 발제하는 분들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부족한 리터러시를 극복하고 좀 더 이해를 하고 살아야겠다.
현재 우리의 삶에서 가장 슬픈 것은 사회가 지혜를 갖추는 것보다 과학이 더 빠르게 지식을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아이작 아시모프
'성장하는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사람의 인터내셔널 - 김기태 (4) | 2024.12.22 |
---|---|
'산둥 수용소'를 읽고 - 랭던 길키 (2) | 2024.08.18 |
일류의 조건 - 사이토 다카시 (0) | 2024.07.16 |
똑똑한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질문하는가 - 이시한 (0) | 2024.06.20 |
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0) | 2024.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