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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산둥 수용소'를 읽고 - 랭던 길키

한국 교회 안에는 값싼 은총이 넘쳐난다. 일단 구원받았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은 착각에 빠진 그리스도인에게 정직하고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에 대해 안심할 수 있는가?"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굳게 붙잡게 되었다. - 박XX 소감

이 책을 읽고 소감으로 반성의 심정을 많이 표현했다. 많은 분들이 기독교 신자로 보인다. 소감을 읽어보면서 이 책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릴 때부터 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경건함의 추구하지만, 결국 폐쇄성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구복신앙적인 강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기독교 모임에도 1년 정도 다녔고, 결혼 전에는 천주교 성당에 다니며 성가대 활동도 2.5년 정도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유독 천주고, 불교보다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 반감이 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기독교 신자로서도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구나. 나만 이상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자신의 반경 45센티미터 안에 한 사람의 타인이 누워 있고, 반경 1.8미터 안에는 적어도 여섯 명이 누워 있는 상황에서, 한밤중에 요강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찾아온다고 해보자. 그것은 자신에게나, 누워서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주나 한 달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이나 이런 시험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은 기숙사의 독신자들에게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내 침대로부터 반경 45센티미터 안에 있는 이웃을 미워하게 되는 일도 큰 어려움이지만, 수많은 낯선 타인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로부터 소외당하는 노인들의 외로움도 엄청난 고통이었다. - p048

군대 훈련소에서 느끼던 생경하고 불편한 느낌이 소환되었다. 많은 인원들을 좁은 공간에 몰아놓고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은 정말 폭력일 수도 있고, 삶의 기본권 박탁일 수도 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지고, 그것에 대해 사회적 압력이 강해져서 내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스트레스가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런 환경에서도, 학교나 직장의 왕따처럼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더 커다란 것을 나이를 한참 먹고 나서 알게 되었다. 인싸든 아싸든 외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고, 극복할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은 더욱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제법 나이가 먹고 나서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를 더 선명하게 만든 것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고위층 영국인 사업가의 아내들은 화장실 청소가 공공 봉사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이 일을 거절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상해지기를 원했던 두 러시아 여성은 화장실 청소를 하기에는 너무 자부심이 강하고 또 불안정했던 반면에, 영국의 지체 높은 부인들은 같은 일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자부심이 강하고 안정적이었다. - p137

게다가 그녀는 상류층의 더 민감한 기준과 요구에도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했다. 상류층의 기준이란, 공정하라, 나누어라, 싫어도 기꺼이 협력하라 같은 수준 높은 도덕적 요구들이었다. 일 자체가 아무리 불편해도, 그녀는 감히 이런 기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상류 계층에서 자란 사람만이 이런 기준을 인식할 수 있다. 아래에서 위를 동경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기준들이다. 청소를 거부했던 러시아 여성들은 자신들이 이런 규칙을 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교양"의 부족 때문에,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씀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깎아내리게 만들었다. - P138

러시아 여성들과 영국 부인들의 사례로, 우리가 살아온 환경의 저변의식으로 인해 교양과 사회적 계급에 해당하는 의무에 대해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수용소 생활이 임시적인 생활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만약 한평생 살아야 한다면, 러시아 여성이든, 영국부인이든 좀 더 다른 태도로 전환되지 않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관계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적 신념, 사회적 계층에 대한 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을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나도 경험했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그런 것이 아닐까? 종교에 "세속적인" 기능이 있을까? 즉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종교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기술과 용기, 이상주의를 수반하는 세속주의가 종교 없이도 인간의 모든 삶을 다 창출해 낼 수 있는 마당에, 종교는 무용지물이 아닐까? 수용소 생활 초기에 이런 질문을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나는 소위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즉 종교란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확실히 나도 후자의 부류에 포함되는 듯했다. - P150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선하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으려 한다. - P179

나는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을 통해 종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좀 더 근거를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이기심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해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을 추구하고 난 뒤 다시 사회적 명분을 가져다 붙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 활동에서 합리적 행동이란 도덕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지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나는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 조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반대로, 인간이 이성적이 되면 그 결과로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 P186

적십자 구호품에 얽힌 이런 소동을 경험하면서,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인간의 공동생활의 양상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언짢은 마음으로 산같이 쌓인 소포 꾸러미들을 바라보며 우리 공동체가 어쩌다 이렇게 다투는 사회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부란 절대로 공동체에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경우에 부는 축복이라고 간주된다. 하지만 사실상, 부는 운 좋게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음식과 평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이 좋지 않아 부를 가지지 못한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 부는 하나의 역동적인 힘으로 너무나 쉽게 악해질 수 있다. 부는 선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 P207

따라서 사회적 갈등을 막는 유일한 해답은 부와 물질적 소유물을 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를 공평하게 나누어 사회적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도덕적 성품을 기르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부가 사회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하느냐 파괴적인 역할을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를 도덕적으로 사용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 P209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런 활동들이 실현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도덕을 기반으로 합리적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구현할 수 있을까? 부를 축척하게 되면 공동체에는 오히려 재앙일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내 생각에는 어떤 공동체에도 문제는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운명체에 가까운 수렵이나, 농경사회에서는 개인의 지나친 부의 축적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론 머스크 재산이 얼마이든, 빌 게이츠가 돈을 얼마나 쓰든 내가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배분이 눈에 보이고, 같은 재화를 동시에 사용할 때 비교하는 것이지, 별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 비교가 되고 있을 때, 혹은 절대 빈곤으로 인해 사회적 합의보다는 개인의 생존 욕구가 강할 때에 국한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보면서,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도 변덕스러운 형제를 품을 포용력이 없다면 그를 섬길 수 없다. 정직한 개신교인이라면 세상과 창조적으로 소통하는 이 가톨릭 신부들의 능력을 본받으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복음을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기 위해 설립된 개신교가, 시간이 흘러 가톨릭 형제들 속에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하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 P343

우리의 수용소 경험은 인간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인간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대단히 창조적이고 천재적이며 용감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압박의 상황에 놓이면 어느 때보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수용소 생활에서는 인간의 이런 자기 사랑의 "보편성"과 당혹스러울 정도의 "부자연스러움"이 드러났다. 끊임없이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동기가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부인했지만 말이다.
(...)
수용소 생활이 깨닫게 해 준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인간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폴 틸리히는 이런 가장 깊은 중심을 궁극적 관심 또는 궁극적 책임감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이 영적 중심으로부터 삶의 안정성과 의미를 얻으며, 그래서 이 영적 중심에 자신의 궁극적인 사랑과 헌신을 다 바치게 된다. - P451

저자는 종교인들의 인식과 행동의 한계를 통찰했다. 조직화된 사회에서 선의의 의도가 개인들의 신념의 추구, 일부 소수의 일탈등으로 전체 조직에서 사회적 활동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됨을 통찰했고, 이는 종교적 경건함, 개인의 심적인 상태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향한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현재의 구조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으며(이상적인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영적인 각성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의 각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정답이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내 생존과 위배되거나, 그런 모습으로 보일 때도 우리가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할까?

종교인으로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분석과 성찰, 그리고 토론과 고뇌를 통해 가장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좋은 방법과 자세를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비 종교인(신앙인)으로서 내가 가져야 할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던져준다.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자체에 포함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복잡한 법규를 제정해도 부작용과 허점은 나온다. 그렇다면 작가의 말처럼 영적인 각성을 통해 이웃과 사회에 대해 궁극적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이기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논리 무기 하나를 장착하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도 한 가지 감동은 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느낀 불합리와 집단에 매몰된 사고방식을 이겨내고, 나만의 생각과 토론과 문제제기, 해결책등을 찾아본 작가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니...

지금의 나는 지금 회사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좀 더 객관적이고 떨어진 입장에서 살펴보고, 다시 공동체에 도움 되는 생각과 토론과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