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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인생> - 위화

지난 4월 말 중국에 다녀왔다. 여행 도중 예전에 읽었던 <인생>을 가져가서 다시 보았다. 이동하는 중간에도, 아내가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근처 카페에 가서 틈틈이 다시 다 읽었다. 처음 읽는 것도 아닌데, 사람 많은 카페에서 눈물이 계속 나와 감추느라 힘들었다.

중국의 선전(심천) 시와 둥관(동관) 시를 다녀왔는데, 심천시는 발달된 모습과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동관시는 아직 낙후(?)된 모습이 많았다.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연휴 공휴일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도 무언가 아련해 보였다. 

지난 10년전 이른 새벽, 심천의 도심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던 역동을 최근에도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출근 시간은 좀 더 늦어진 것 같다. 젊은 중국인들의 역동성은 여전히 힘차 보이지만, 외지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 70~80년대의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한평생 힘들게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 관료적이고 비생산적인 환경에 적응하여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람들, 새로운 꿈을 찾아서 먼 곳에 와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두가 집안 어른들, 친구들, 후배들을 보는 것 같아서 정감이 갔다. 관심을 가지면 좀 더 좋게 보이는 것 같다.

5월 성장판 도서인 <인생>은 중국의 유명 소설가인 위화의 대표작 중 하나다. 소설가 위화는 영화배우 하정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허삼관 매혈기>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나도 영화는 보았지만, 큰 감명은 없었다. 그런데 이 <인생>은 읽을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주인공 푸구이를 보면서 안타까움이 강하게 각인되는 이유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몇몇 집안 어른들이 과거에 그랬고, 여전히 일확천금을 바라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생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고생한 푸구이의 아내인 자전을 대해 생각해보면,  한평생 고생하신 어머니가 오버랩된다. 다만 어머니는 자전과는 다르게 당신 혼자서도 자식들을 끝까지 잘 키우시고, 친손주, 외손주까지 모두 키워주시다 돌아가셨다.  

가족을 위해 팔려가던 펑샤를 생각하다 보면,  누나가 생각난다. 집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했던 누나는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평범했던 남동생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 못했다. 역시 다행히 누나는 이후 40년을 열심히 살았고, 캐나다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다. 

처음 푸구이가 노름으로 집안을 거덜 냈을 때 제일 마음이 답답했다. 가난해지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가족이나 관계까지 망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을 때는 마음의 여유도 없어져서 형제, 친구, 부모자식이 서로 탓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병치레에 효자가 없다'는 말처럼, 가난과 질병은 불행의 동전 앞뒤처럼 붙어 다닌다. 푸구이가 쿠건의 급작스런 죽음의 징조를 알아채지 못해 후회하지만, 우리 모두는 모두 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환자에게 좀 더 잘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전의 말과 푸구이의 말이 위안을 준다. 두 자식을 먼저 보낸 부부는 각각 자기 인생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한다. 한평생 열심히 살았던 자전이나, 젊은 시절 잘못된 행동으로 남까지 불행으로 만든 푸구이는 모두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P256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의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펑샤와 유칭 둘 다 나보다 앞서 떠났으니 내 마음도 편안하네요. 더 이상 그 애들 때문에 마음 졸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나도 어미였고, 두 아이 모두 살아 있을 때 나한테 지극정성이었으니 사람이 그 정도 살았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죠."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야 해요. 쿠건과 얼시가 있잖아요. 사실 얼시도 당신 아들이나 다름없고, 쿠건도 크면 유칭처럼 당신한테 잘할 거고, 효도할 거예요."

P279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춘성, 그들은 한바탕 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웅다웅해 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을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소설을 읽은 즐거움은 작가의 역량과 독자의 정성에 따라 즐거움의 크기도 다르고, 무한 반복되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한 것과, 표현하지 못한 영역들이 있고, 독자들의 해석에 따라 그 영역들은 크기와 깊이가 제한 없이 커질 수 있다고 한다.

작가 위화는 삶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인물을 표현한다. 주인공과 주변인물을 어렵게 만드는 플롯을 만들고, 그 사건과 경험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캐릭터를 완성해 간다. '인생극장'의 영웅이 점차 만들어진다. 

P006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

P008
사람과 그의 운명은 서로 상대방을 포기할 방법이 없고, 서로 원망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함께 가고, 죽을 때는 빗물과 진흙 속으로 함께 녹아든다. 아울러 <인생>은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고난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 속담에 '머리카락 하나에 삼만 근을 매달아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넗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이 푸구이와 다른 것이 있을까? 푸구이가 노래한 말처럼, 어리석은 초반기, 겁만 내는 중반기, 후회하면서 성숙해지는 후반기로 나누는데, 나는 후회는 하고 있지만, 성숙해지고 있는가? 푸구이처럼 자신의 삶을 비하도, 왜곡도 없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P063
그러나 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P282
"오늘 유칭과 얼시는 한 묘를 갈았고, 자전과 펑샤는 칠 할에서 팔 할 정도 갈았고, 쿠건는 아직 어려서 반 묘를 갔았단다. 네가 얼마를 갈았는지는 내 말하지 않으마. 그걸 입 밖에 내면 내가 너한테 무안을 준다고 여길 테니까. 돌려 말하자면 너는 나이가 많으니 이 정도 가는 데도 온 마음과 힘을 다 썼다고 볼 수도 있지."

책은 마지막을 저녁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치열했던 삶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가메시의 서사시처럼 허전하고, 헛되고, 허무하다. 그러나 경험은 헛되지 않은 것처럼 찾아오는 끝을, 어둠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삶의 끝을 웃으면서 마주할 수 있을까? 

P283
연기가 농가의 지붕에서 솔솔 피어올라, 노을빛 가득한 하늘로 흩어진 뒤 자취를 감췄다. 
여자가 아이를 어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내 앞에서 똥통을 지고 가던 남정네의 멜대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천히 들판은 고요 속에 잠기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을빛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은 구절들을 옮겨본다.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좀 더 오래, 또렷하게 기억하고 싶다. 내가 느낀 점이 다시 살아나고, 살아나는 시점에는 좀 더 넓고, 깊은 경험이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P025
"걱정 마세요. 내 아들은 가문을 빛낼 거예요."
"네 아버지도 젊었을 때 할아버지께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P031
그녀는 나를 깨우치려 했던 거야. 여자들이 겉모습은 다 달라 보여도 아래는 모두 같다는 뜻이었지. 자전의 속내를 눈치채고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네. "이런 이치는 나도 알아"
정말로 이치는 나도 알았어. 하지만 위쪽이 다르게 생겼으면 그 각각에 대한 내 마음도 다 달라지니 난들 어쩌겠나.

P057
며칠 동안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네.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

P061
"펑샤, 내가 네 아빠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펑샤는 그 말을 듣자 깔깔 웃으며 말했어.
"아빠도 제가 펑샤라는 걸 잊지 마세요."

P113
"소도 늙으면 사람 나이 든 거하고 똑같다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단 한숨 쉬어야 뭘 먹을 수 있거든." 

P117
"나 밭에 가오. 펑샤를 데려간다는 사람이 오면 그냥 데려가라고 하구려. 나 만나러 오지 말고."

P149
그런데 자전은 오히려 즐거워하며 펑샤의 등에서 중얼거렸지.
"치료할 수 없다니 다행이에요. 무슨 돈이 있다고 치료를 해요?"
마을 어귀에 이르자, 자전은 좀 나아진 것 같으니 내려서 혼자 걸어가겠다고 하더군.
"유칭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P182
나중에야 나는 자전이 자기 옷까지 뜯어서 애들 옷을 만들었단 걸 알았지.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네.
"옷은 안 입으면 빨리 못 쓰게 돼요. 내가 그 옷들을 못 입게 됐다고 옷까지 못 쓰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P183
"이치대로라면 나는 옛날에 죽었어야 해. 전쟁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유독 나만 안 죽었잖소. 그건 바로 내가 매일같이 살아서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고 속으로 주문을 건 덕분이지. 그런데 당신은 우리를 이렇게 쉽게 버리겠다는 거야?"
"푸구이. 나 죽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랑 애들 얼굴 매일 보고 싶어요."

P200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 데서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 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

P203
자전은 나한테 시집온 다음부터 단 하루도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떠나야 할 때가 오고 만 거야.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저 울기만 하고, 괴로워만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현실적인 일들을 생각해야 했다네. 자전의 뒷일은 남부끄럽지 않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P210
"모두 이리로 와서 마오 주석의 훈화를 들으시오."
우리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지. 나라 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네. 우리는 모두 대장의 말을 들었고, 대장은 상부의 말을 들었지. 상부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네.

P229
"다 늙어서 신발에 진흙 묻는 걸 신경 쓰나?"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사람은 늙어도 사람이잖아요. 자고로 사람은 깔끔해야 하는 법이라고요."

P257
"자전은 죽기도 잘 죽었다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말이야. 죽은 뒤에 아무런 시비도 남기지 않았지. 죽고 나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여자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P262
"펑샤가 죽은 지도 꽤 되었으니, 잊을 수 있으면 잊어버리게나."
"저한테는 오직 펑샤를 그리워하는 복만 있을 뿐이에요."

P278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을 구태여 바랄 필요가 없단 말일세. 마을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는 와서 묻어줄 거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테니. 나는 남들한테 공짜로 나를 묻어달라고 하지는 않을 거라네. 베개 밑에 십 위안을 넣어뒀는데 그 돈은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돈이 내 시체를 거둬줄 사람 몫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또 내가 죽은 다음 자전이랑 우리 애들이랑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말이야. 

P281
"푸구이. 이 소는 당신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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