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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아비투스 - 계층을 위한 품위자산

'아비투스' 처음 들었던 말이다. 몇 달 전 박**님께서 좋았던 책이라고 소개해주셨다. 평소에도 아주 좋은 책을 잘 추천해 주셨지만, 나는 조용히 외면했었다. 그분의 평소 성격과 인격처럼, 교양과 인문, 철학이 섞여 있는 그런 책 같았다. 알라딘에서 찾아보니 인문교양으로 분류된 책이다. 살짝 내 취향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ChatGPT에게 아비투스의 정의를 물어보았다. (요즘 이게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들 것 같았다. 책대신 유튜브에서 내용을 정리해 주듯이, 인공지능이 지식을 요약해 주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사고의 퇴보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아비투스(Habitus)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개발한 개념으로, 사회화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일련의 성향과 행동을 말하며,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형성합니다. < 부르디외에 따르면 아비투스는 가족, 친구, 학교 및 기타 사회 제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개발되는 일종의 정신적 및 행동적 틀입니다. 아비투스는 선천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의해 형성됩니다. - 출처 ChatGPT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성별, 계급, 문화적 경험의 차이로 인한 생활양식과 소통방식이 있으며, 그것은 개인이 단기간에 깨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 나이 때 많은 남자들이 공감하는 불편한 사례가 있다. 

처음 미팅(소개팅)을 나갔을 때가 기억난다.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도 어색한데, 경양식 집에 가서 돈가스 등을 썰어먹기가 영 불편했다. 배가 고파도, 고기가 앞에 있어도 음식을 천천히 먹어야 하고,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고기와 밥도 먹어야 했다. 

게다가 신경써야 할 상대와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대화의 내용도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화의 주도권을 잃게 되고, 이런 식사는 한 번도 안 해본 것이 그대로 티가 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모인 곳에 가서 식사를 한다면 그야말로 촌닭이 되는 거다. ('촌닭'이란 '촌닭 같은 용어' 정말 오랜만이다)

영화에서처럼 누군가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나타나서 친절한 설명과 도움을 준다면 모를까,  실제로는 그런 난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저 묵묵히 눈총을 받으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말없이 투명인간처럼 지내고 무사히 모임을 마치고 난 다음날 소문은 이미 퍼져있을 것이다. 모임에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식욕이 엄청 좋은 촌닭이 왔었다고..

대학 때 기독교 서클에 다녔었다. 순수 복음주의 경향인 기독교 모임에 다니면서, 나는 아직 신의 존재를 못 믿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것인지, 상황 판단력이 꽝이었는지 모르지만(지금도...), 선배님들이 잘 받아 주었다. 

하지만 결국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왔던 것 같다.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고, 모임이 변할 수는 없고, 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절은 절대로 떠나는 법이 없으니, 땡중이 절을 나와야 하는데... 눈치 없이 오랫동안 다녔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였을까?

일반적으로 직장이든, 모임이든 새로운 멤버는 환영을 받는다. 다만 개인적 환대와는 다르게 전체적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는 젊은 사람들이 더 환영을 받는다. 왜 그럴까? 동양식 연공서열 때문일까? 아마 다른 이유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보통의 경우 좀 더 개방적이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력이 크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생각과 의견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집단의 사고관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플랑크나 슘페터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 한.

"기존 세대는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 - 조지프 슘페터
"새로운 과학적 진실은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 막스 플랑크

물론 다 알겠지만, 젊은 사람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 서클을 다닐때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젊었지만, 사고의 편견이 심해서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후에 천주교 영세도 받았지만, 결혼 후 역시나 다니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릴 때의 영향은 강력한 것 같다.

반면에 MZ세대를 보면서 다른 생각도 든다. 나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게임이 삶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은 지금도 게임의 영역(?)에서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다. 바둑, 당구, 스타 등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MZ 세대와는 즐기는 대상이 변한 것뿐이다. 

그런데 대상이 다르다는 것은 생활양식이나 커뮤니케이션 문화도 변한다는 것이다.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온라인 게임과 채팅, 길드에서 던전 공략 시 협업하는 방식등을 통해 쌓이는 유대감 등은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기 어렵다. SNS에서는 커뮤니티 별로 이미지 관리도 중요하다. 이는 기존 세대들이 쉽게 따라가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이 개인의 역량과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면 그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들이 경험한 커뮤니케이션 형태와 맥락과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같이 어울리기 어렵다. 지금도 천천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들도, 각종 단체나 모임들도, 그것에 배여있는 '아비투스'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것들도 변할 것이다. 지금까지 굳건한 최고 계급의 아비투스가 있고, 천년 제국처럼 오래 지속하겠지만 조금씩 변해갈 것이고, 새로운 유입된 멤버들은 성벽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거나, 허물고 다른 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는 심리/문화/지식/경제/신체/언어/사회 7가지로 구분했다. 그리고 책에서는 첫 번째로 '아비투스가 삶, 기회, 지위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반대라고 생각했었다. 신분 상승이 되면 저절로 위엄과 여유와 교양이 쌓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리스 박사는 아비투스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말하며, 그것이 우리의 계급을 결정짓게 만든다고 한다. 부모나 환경에서 후천적으로 부여받는 것이고, 이는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고 한다. 좋은 아비투스는 계급을 좀 더 강화하거나, 나은 계급으로 이동 가능하게 한다.

의사나 법조인, 음악가의 자녀들은 부모의 직업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부모의 영향으로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의 자식들은 부자가 되기 쉽다'라는 말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아비투스 보다는 물려받은 재산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회가 드는 경우가 많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육아에 정답은 없지만 내가 이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때 내가 주었던 영향력은 어느 아비투스 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가 받았던 아비투스는 무엇일까도 생각해 본다.

상류층 자녀들은 책임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훈련하고, 어려서부터 구별 짓기와 탁월함을 몸에 익힌다.

중산층 전체의 전형적인 아비투스는 성과 및 지위 추구다.

생존 기술과 관련한 아비투스는 상류층보다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계층에서 더 강하게 형성된다.
인간은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일에 노력을 쏟는다. 인생 설계의 모범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나 자녀를 위해 그런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 "당신은 볼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생존투쟁과 기술에 대한 양식을 조금 물려받은 것 같다. 최하의 생활 여건이 되더라도 나는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나는 아이들에게 중산층 전형적인 성과 및 지위 추구의 분위기를 요구했던 것 같다. 나는 상류층의 문화를 느껴보지 못했고, 몰랐고, 아이들에게 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도리스 박사는 출신 배경을 넘어서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적응이 어려우니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전에 자신의 탁월함(정상)의 기준을 어디로 볼 것이냐는 숙제는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준도 내 위치에 따라서 변할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가장 최고급으로 영향받은 것은 심리적 자본이다. 굴하지 않는 정신과 태도, 낙관적인 전망과 회복 탄력성은 어머니가 내게 주시려고 했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내가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회복 탄력성은 그럭저럭 어머니 쪽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돈을 벌고 파티를 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 여러분! 속상하지만 일단 식사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멋지다."
그들은 그런 정신력을 요정으로부터 탄생 선물로 받은 게 아니다. 그들은 위기 때 그냥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버틴다. "플랜 A가 실패하면 당황할 필요 없다. 플랜 B, 플랜 C... 알파벳은 아직 25개나 더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체 근육과 마찬가지로 내적 저항력도 체계적으로 단련한 덕분에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위엄 있게 대처한다.
세계적 부자인 워런 버핏은 여가의 80%를 독서로 보낸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 계발서, 경영서, 투자 관련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라고 권했다. "이런 책들을 매일 500쪽씩 읽으십시오. 지식은 그렇게 복리 이자처럼 쌓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럴 가능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여러분 중 극히 일부만이 그 가능성을 이용할 것입니다."

흔히들 재능은 지능과 신체적 능력을 이야기한다. 환경은 경제적 재산이나 문화적 경험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레질런스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앞의 것들은 비교가 되지 않는 축복이다. 나는 그런 회복 탄력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많이 배울 수 있었지만, 가능성을 별로 이용하지 못했다. 

책에서 나온 아이는 25센트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포기하고, 20센트 셔벗아이스크림과 점원에게 줄 5센트의 팁을 택한 사례가 나오는데, 이런 점은 아직 내게 멀었다. 아직은 나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어디든 쩨쩨하게 굴지 말라!'는 가르침은 좀처럼 실천하지 못한다.   

일단 내 마음의 평정과 상대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 그래야 가능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노력하여 마침내 그것을 갖추었을 때는 이 책을 추천해 준 박**님처럼 은은한 향이 내게도 배일까? 심리적 자산은 너무도 탐이 나지만 너무도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적확한 지침을 준다. "칭찬은 향수와 같다. 향을 내되 코를 찔러서는 안 된다." 감탄과 인정은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문화자본은 내게는 그저 사치로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열정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과거의 사치품이나 신상들은 낭비처럼 보였는데, 다른 견해를 보인다. 지금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비싼 자전거를 사는 사람들을 과거와는 다르게 열정의 표현으로 본다. 어느 분야든 아는 만큼 보인다. 다만 너무 다양한 것이 문제랄까..

새로운 사치품들은 옛날의 지위 상징보다 더 정교한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는 지나간 지위 상징을 쓰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가져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필수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셰프 냉장고는 높은 수준의 요리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고급 자전거는 좋아하는 스포츠를 열정적으로 즐긴다는 뜻이다.

도리스 박사는 지식자본에서 상류층을  T자형 인물로 본다. 한 분야는 깊게 알고, 나머지는 넓게 알고 있는 인재다. 그리고 더 발전하면 TT 지식, 더 나아가 TTT자형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포기하는 것이 맞겠다. 'I'형도 어렵고, 'ㅡ'형도 안된다. 남은 인생은 그냥 책이나 조금 더 읽어야겠다.


경제자본에서 제일 인상 깊은 글이 있었다. '내가 가진 건 과분하지만, 아직 훨씬 더 많이 필요합니다.'라는 글이었다. 세계적 스포츠 스타들이 좋은 성적을 거 둔 후에 인터뷰할 때의 말과 비슷하다. 자신만만하고 야망을 비추면서도 그래도 겸손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내와 맞벌이를 30년 넘게 지속하면서 경제적 환경은 좀 더 나아졌다. 강박에서 좀 벗어났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은 된다.  과분하지만 훨씬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는 많아졌다. 그것이 고민거리를 많이 줄여준다. 물론 고민거리는 즉시 다시 생겨나지만.

"돈만으로는 행복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우는 것보다는 택시에서 우는 게 낫다."
전문가의 조사에 따르면 로또 당첨자의 80%는 2년 뒤면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더 가난해진다. 수학자 크리스티안 프리츠는 "(재정적) 성공의 길은 과정이지 이벤트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이 현상을 깔끔하게 설명했다.
"나는 사람들이 수십억 자산을 원하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 실체적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언하건대 그 이상을 가지더라도 햄버거는 다 똑같은 햄버거다." - 빌 게이츠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뇌뿐 아니라 주름, 몸짓, 말투, 억양, 발음, 버릇 등 우리를 나타내는 모든 것에 기록된 몸의 역사"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회적 지위는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

중국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옷을 맞추는 고위 관리에게 주인이 지위를 높이를 묻지 않고, 얼마나 오래 다닐 것이냐는 말로 앞섶과 뒷섶의 길이를 물어보면서 깨우치게 했다는 것이다. 앞섶을 짧게 해서,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 오래 다닐 것이라는 설명도 하면서.

사람의 자세를 보면 근력과 태도가 보이고, 얼굴을 보면 타인을 대하는 심리적 안정감, 자기 관리 상태, 경제적 안정도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입은 옷을 보면 평소의 행동방식과 가치관도 알 수 있다. 이 역시 나이 들면서 좀 더 동의하게 된다. 자세와 얼굴과 옷은 그 사람을 충분히 알게 해 준다.


언어에 대해서는 '한정어'와 '정밀어'에 대한 설명이 공감되었다. 언어라는 재료를 얼마나 세련되게 자유롭게 다루는지에 대한 척도가 사람의 수준과 계급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사회적 자본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공감한다. 다만 이것이 기회균등이라는 사회적 정의 개념과 상충된다고 생각한다.

최순실, 조국 이런 인물들의 이슈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공분을 일으킨다.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의 수없이 많은 특혜시비는 자주 일어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 속하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나 보다.

도덕적 엄격함은 주로 중상위 중산층의 아비투스다. 중산층을 화나게 하는 일이 상류층에게는 종종 사소한 문제이고 하류층에게는 스스로를 돕는 요령으로 인식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이유다. 내가 가진 편견과 편향은 이 책을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최상위 아비투스는 책임감과 도덕적 잣대의 엄격함이 크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런 수준도 아니라서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지금의 사고방식이라면 다른 계층으로의 변화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최상급 계층으로도 가지 못하고, 앞으로 형성된 신세대의 아비투스에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유연하고 열린 마음으로 경험하고 이해하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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