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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나란 무엇인가 - 히라시노 게이치로

'멀티 페르소나'라는 말이 유행한다. 캐릭터나 마케팅에서 '부캐'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화에서는 마블에서 제작하는 만화영화에서 메타버스의 개념으로 소개되며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에 대한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근원적으로 생각되었다.

MBTI 성격분석이라던가, 별자리 등 모두 한 개인의 성격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심지어는 운명까지도 모두 정해져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것에 전면적 반대의견을 펼쳤다. 내게는 응원군 같았다.  

P008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P008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의 어원은 ‘나눌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서두에서 썼다. 이 책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분인 dividual’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한다. 부정 접두사 ‘in’을 떼어버리고, 인간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P009
개인을 정수整數 ‘1’이라고 한다면, 분인은 일단 분수라고 떠올려주기 바란다. 나라는 인간은 대인 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나 성장기 혹은 청년기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특히 내가 겪은 80년대에는 정체성에 대해 강요를 받기도 하였다. 어느 쪽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였다.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그쪽의 가치관에 따른 생활을 하지 않으면 불편한 눈총을 받았다.

P030
정체성의 동요는 시대를 불문하고 성장 과정에서 누구나 경험한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한 번도 안 하고 어른이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판가름 나지 않으면 끔찍이 괴롭다. 돌이켜보면 장래가 너무나 막연했던 나의 대학 시절도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암울했다.

문유석 작가(판사)가 자신에 대해 말했듯이 딴따라의 기질은 어디서도 욕을 먹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활을 누리는 것은 아주 조용히 해야만 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여자는 양파같다고 하던가? 까도 까도 나오고 결국 아무것도 없다고 한 말이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이 당시의 남자의 가치관은 무엇이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된 사고와 행동이었을까? 군복만 입으면 반려동물 수준이 되는 그런 것이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맞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P033
복숭아는 한가운데 씨가 들어 있다. 사람에게도 그렇고 확고한 자아(=진정한 자아)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 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나 속성을 한 꺼풀씩 볏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P032
인간에게는 여러가지 얼굴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설적이지만, 인격은 여러 개 있어도 얼굴은 단 하나뿐이다.
P033
모든 인격을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단 하나뿐인 얼굴이다. 반대로 말하면, 얼굴만 감출 수 있다면 우리는 여러 인격으로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인터넷에서 나체 사진을 게시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급진적인 실천자다.
P037
한 명의 인간은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복수로 ‘나눌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진정한 나’, 수미일관 된 ‘흔들리지 않는’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폭넓은 고찰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설명해줘서 아주 고맙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 중에서 일부는 공감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렇게 책의 전반적으로 공감이 갔던 책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작가가 상세하게 설명해준 이유인지 어려운 책도 아닌 것 같고, 구절구절을 갈무리 하면서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P041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만큼 타자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상대를 막론하고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 진정한 나야!’라고 억지를 부리려 하면, 상대가 넌더리를 낼 게 불을 보듯 훤하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개성 사이에서 조화를 찾아내려 하고, 그때그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격을 만들어내며, 실제로 그 인격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저절로 기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여러 인격으로 본심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언동에 감동받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인생을 바꿀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예컨대 그 여러 개의 인격이 모두 ‘진정한 나’다.
P043
일과 일상을 살아가려면 계속성을 가지고 특정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 우리는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해가 지는 반복적인 주기를 살아가면서 주위의 타자와도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거듭해간다. 인격이란 그런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일종의 패턴이다.
P049
팔방미인이란 분인화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당히 맞춰주고 통한다고 얕보고, 상대에게 맞춘 분인화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 분인은 상대에게 강요당하면 왜곡된 형태로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혹은 분인화에 거부반응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일방통행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P053
감당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에 맞춰서 실제로 사귀는 사람 숫자도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분이의 숫자는 분명 상한선이 있을 것이다.
P056
개인이 ‘나뉠 수 없는’ 이유는 애당초 그리스도교의 신이 일자였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유일신과 마주하려면 개인 또한 하나뿐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다종 다양하다. 나에게 일절 감추는 게 없어야 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드러내라는 요구는 오만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신이 디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에 대한 상대의 분인일 뿐이다.
P059
나라는 존재는 외따로 고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기 보다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나’라는 개념은 인간을 격리시키는 감옥이다.
P062
당신과 접하는 상대의 분인은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P063
사람이 누구와 친하게 교제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내가 참견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나에 대한 상대의 분인까지다.
P068
’자아 찾기 여행’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리석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분인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직감이 발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행을 분인주의적으로 바꿔 말하면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여행을 통해 새로운 분인을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P070
인간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을 가능하면 다양한 나로 살고 싶어 한다. 대인 관계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나를 즐기고 싶어 한다. 언제나 똑같은 나로 감금되어 있는 것은 큰 스트레스다.
P075
분인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이 거북하고 꺼려지는 이유는 타자를 일절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취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뭐, 좋을 대로 해’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분인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반드시 한 번은 타자를 경유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는 역설이야말로 분인주의의 자기 긍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P081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마음 편하고 좋다. 좀 더 말하면, 상대가 어떻든 간에 나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꿈을 꾸듯 황홀하다.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러니 지속하는 관계란 서로가 주고받는 헌신이 아니라 상대 덕분에 각자가 스스로 느끼는 어떤 특별한 편안함이 아닐까?
P082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P083
현대에도 연인의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아무리 사사로운 일이라도 절대 숨겨서는 안 된다고 선고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상대에게 신이 되려는 것이다. 나도 모든 걸 밝힐 테니 피차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내친김에 상대까지 신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은 한 쌍의 신이 하는 연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