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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운동

나의 죽방전설

당구 프로리그가 6월 시작한다고 한다. 뉴스에 따르면 우리나라 당구 동호인은 1천2백만 명으로 당구용품 80% 정도를 소모한다고 하니 절대적인 위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당구장의 모습은 과거와 많이 다르다. 제일 크게 바뀐 것은 2018년 당구장 금연이라고 생각된다. 당구장에서의 금연으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골초 아저씨들도 그럭저럭 적응을 하는 것 같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배연기로 인해 자주 목감기에 걸리던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당구장에서 음주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실제 주류 판매 단속도 했지만 실제 근절은 좀 힘들었다. 나도 금연으로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당구장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도 마시며 즐긴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면 술기운을 빌어 승부에 따른 내기의 강도도 좀 더 높아지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단속의 여파인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모습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느덧 사라졌다.(지방의 일부에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점차 지속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젊은 여성들 및 청소년, 노년인구의 증가로 당구장의 모습은 필수적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깨끗하고 쾌적하고 환경은 기본이고, 서비스에 차별화에 따른 가격대의 분화이다. 국제식 대대 전용 구장은 매 게임마다 당구대를 닦아주고 마치 카페 같은 음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며, 반면에 동네에서는 일일 요금제를 통한 최저가 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청소년과 경로우대층 중심)

나는 당구를 86년부터 시작하여 약 33년간 즐겨온 나도 당구인으로 불릴만하다. 25년간은 4구 당구를 즐겼지만, 이후 직장 선후배들과 내기 당구를 하면서 3구 당구에 푹 빠져들었다. 초창기 시절 내기 당구로 돈을 잃을 때면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었다. 실력이 부족하면 핸디 조건을 부여해도 결국 승부에서 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리적인 요소가 승부에 큰 영향을 주는데 낮은 실력은 불균일한 점수 결과가 나오고, 그것은 심리적으로도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은인이 나타났다. 막내 처남이 당구를 엄청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와 매주말 당구장에서 2시간씩 당구를 치다 보니 처남도 실력 향상이 되었지만, 처남에게 배우는 나는 더욱 실력 향상이 되었다. 직장에서는 선후배와 내기 당구를 치고 집에서는 처남과 연습 당구를 치니 몇 년간 당구 실력은 조금씩 향상되어갔다. 실제 처남과의 대화중 60% 이상이 당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싱글이라 그런지 관심사가 취미생활로 몰빵 되는 것 같았다. 나도 아내가 가정의 절대다수 부분을 지탱해주고 있어 마음 놓고 개인적 취미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당구를 치면서 승부는 필연이다. 모든 스포츠는 승패를 겨루듯이 우리는 당구를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기본적으로 당구는 신사적인 매너를 추구하지만, 죽방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아래의 그림처럼 당구십계명으로 알려진 것처럼 철저하게 승부를 추구해도 이기기 어렵다. 모두들 당구십계명(당구십결)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도 누가 진정한 임전무퇴의 전사인가를 논하기도 하였다. 지금 정상급 프로선수들도 내기 당구를 많이 했었고, 그들과 같이 게임을 즐겨본(혹은 관전한) 고수들도 엄청 많기 때문에 각자의 승부를 위한 최적의 이론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당구 십계명

그중 제일 많이 알려진 배수진 작전(돈 없는 상태의 내기 당구)도 고수 세계에서는 최고 레벨은 아니라고 알려졌다. 진정한 고수는 '낮잠 자고 난 뒤 슬리퍼와 반바지를 입고 나온 백수'라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으로 육체적인 준비가 되어있고, 낮잠을 잔 백수라는 것은 다른 것에는 신경을 끈 승부에 대한 집중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는 것은 집 근처로서 낯익은 당구대의 지형적인 이점까지 갖춘 최적의 전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남과의 승부에서는 형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낮잠 + 슬리퍼 작전을 써서 주말 승부는 겨우 모자라는 실력을 맞추었지만, 주중의 퇴근 후 승부에서는 피곤 + 복장 불편 + 시간 없음 등의 불리한 조건으로 패배의 경험이 많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처남도 나도 실력이 점차 향상되었고, 내가 핸디를 받고 게임하던 사람들도 어느덧 맞게임을 치거나 오히려 내가 핸디를 주고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당구는 내게 즐거움과 성취감을 조금씩 느끼는 스포츠로 발전했고, 당구를 즐기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유산소 운동 대신하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그렇게 당구 시간은 늘어나서 일주일에 5번 이상을 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주중에 3~4번 주말에 2번 이렇게 치면 당구 생각이 점점 많아지고, 당구를 잘 치기 위한 스마트폰 메모도 늘어났고, 유튜브 강의 및 당구 방송도 보게 되었다. 당구 큐대를 사려고 심각하게 고민도 하고, 심지어 혼자 당구장을 찾아서 직원에게 게임 매칭을 요청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직장과 집 근처 그리고 친척들 사는 곳 근처에 국제식 전용 당구장을 찾아서 게임 기록 시스템에 이름 등록을 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올해 초 주말에 시간이 많이 남아 한번에 7~8시간을 당구를 즐긴 경우가 있었는데, 의외로 즐겁지가 않았다. 처남과는 2시간만 치니까 아쉬움이 조금 남았고, 그리고 당구에 대한 열정이 내게로 전염이 되어 다음번에는 잘 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은데, 일명 제일 재미가 좋다는 내기 당구를 쳐도 시큰둥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달리기나 자전거는 즐기는 동안에는 페이스 조절을 위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결국 온몸이 지치고서도 이겨내야 하는 절제력이 필요했고, 운동을 마치고 나서는 뿌듯한 쾌감과 피로감이 몰려오는 데, 당구는 많이 틀렸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지속하기는 좀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마치고 나서의 기분이 좋았는데, 당구는 무언가 시간을 버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에 다른 것을 하면 좋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당구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거나, 바둑 방송을 감상하는 것에 비해 당구는 더 좋아하는 것이지만, 요즘은 책과 운동마저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선순위에서 점점 높아지는 가족과의 식사시간 등이 치고 들어오면 당구는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더구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인 처남이 몇 개월 전부터 바쁜 일상으로 연락도 못하고 사는 터라 외부적 요인도 자극도 거의 없었다. 

자전거 출퇴근을 하다 보면 제법 피곤해지고, 이는 수면시간을 제대로 확보해야 하는데, 당구를 치게 되면 다른 활동은 못하게 되니, 당구 치는 시간이 점점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구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다른 우선순위가 높아진 것이었다. 나는 은퇴 후의 취미생활로 당구가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고, 주변에서 접근이 쉬운 전국적으로 많은 당구장과 내 또래의 사람들은 당구를 어느 정도 즐길 줄 알고, 혼자서도 동호회 등에 가입하여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내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것 같다  

아쉽지만 당분간 이별을 해야 할 듯하다. 처남에게도 미안하고 직장 선후배들에게도 미안하지만 되도록 당구는 줄이는 것이 내게는 맞을 것 같다. 은퇴 후 시간이 많이 남는다면 즐길만한 취미인데, 아마 그때에는 악기에게 우선 순위가 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했지만 이제는 조금 멀리하려고 하는 당구,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취미로서 추천할 만하다. 

지난 2개월 넘게 당구를 치지 않았는데, 오늘 오후에 이상하게도 당구 약속이 잡혔다. 승부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려나?

'날이 저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과정일지 모른다' -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채사장>

'헤어짐도, 망각도, 죽음도, 아쉬운 것도 없다. 우리는 운명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테니' -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채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