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역사 - 나이젤 워버턴
지난달에 이어 요번 달에도 철학 개론서(?)를 한 권 읽었다. 지난달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철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책이었다.( https://eaglemanse.tistory.com/67) 이번 책은 양재나비 독서모임의 주제도서라서 기한이 있었다. 책을 알게 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책의 분량과 목차를 보고 마음이 다급해져 먼저 읽던 책을 멈추고 바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번 철학책도 읽기 힘들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읽는데만 3일이 걸렸고, 2일간 메모하며 정리를 했음에도 절반 정도밖에 못했다. 모임에서 소감을 나누던 중에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읽기 힘들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의 부재중 우리 조원님들의 연합작전(?)에 말려 대표로 앞에 나가서 전체 발표도 했지만,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아 버벅거렸다. (다른 이유도 쪼금 있었다)
지난번의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도 50개의 챕터별로 각기 다른 주제와 철학자가 나오는데, 이 책도 40개의 챕터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내게 관심 있는 부위만 자세히 읽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철학의 역사라고 명명했듯이 철학 흐름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알려주기에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나하나 주제별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는 것은 힘들다.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책을 읽을 필요가 있었다. 천천히 녹여먹듯이 가볍게 읽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어 콱콱 물어먹으니 미처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가 띵하고 아프다.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처럼 맛나 보이는 부분은 조금 더 맛을 음미하며 먹으면 된다.
(옆에 계시던 박*희 선배님처럼 이 어려운 책을 원서로 천천히 읽으면서, 시간을 두고 아이스크림을 즐기듯 하는 것이 참 부러웠다.)
▣ 수박 겉핥기처럼 느낀 3가지
첫 번째 중세의 이성 암흑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기원후 천년 넘게 철학자의 등장이 드물었다. 그리고 이후 기독교 신학을 이성적으로 살펴보거나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배타적인 절대 믿음의 종교인 기독교와 항상 의심하고 생각하는 철학이 얼마나 상극이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철학이 시녀 역할을 한 적은 있었다.)
역사 서적에서 본 것이지만 기독교 사상을 극복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동방(아시아)과의 전쟁과 교류를 통해 자극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조선 성리학을 극복하는 실학사상도 이런 유럽과 주변국들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들었다. 각 국가의 다채로운 발전이 서로에게 자극을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두 번째 서양철학의 원류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명의 스승이 서양 철학의 주된 흐름을 장악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느끼게 되었다. 논쟁과 논리의 전개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대화법으로, 기독교 사상을 비롯한 이상과 진리에 대한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원류이고, 실질적인 개인의 삶을 반추하고 행복과 도덕이라는 개념을 자리 잡게 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 번째 서양 철학의 꽃으로 불리는 칸트나 니체의 철학을 자세히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이황이나 이이의 심오한 사상과 마찬가지로 자세히 알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 깊숙이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하겠지만 지금은 별도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현대 철학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어서 그것들을 배우는 것도 벅차다는 느낌이다.
▣ 기억하고 싶은 생각의 문장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했다. 등에는 심각한 피해는 없지만(구글에는 다른 의견이 있다) 아주 귀찮고 물리면 아프다. 자신의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에 대해 주장한 것이다. 말하기 불편하거나, 외면하거나, 미처 몰랐던 것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본인의 가치였다고 주장한다.
나야 아직까지는 사회적 등에가 되기는 어렵고, 그저 자신이라도 자주 반추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싶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살아가고 싶다. 나를 일깨워주고 죽비가 되어줄 친구를 만나고,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가족과 지내며, 새로운 시야를 넓혀줄 커뮤니티에 속하고 싶다. 지금까지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며 자축하고 회고하는 삶이 내게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010
그는 스스로를 말 등 위에 앉아 귀찮게 물어대는 말파리, 즉 등에라고 생각했다. 등에는 성가신 벌레이지만 심각한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P013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지혜로운 인물이 된 이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을 반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에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단언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가축에게나 어울리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정하였다. 다만 행복을 증진하려면 가능성 있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최근에 실천하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언제, 어디서든, 같이 혹은 혼자라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죽음을 초연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이 영생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사회에서는 쾌락추구를 인정하고 현세의 삶(행복)을 중시하는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P039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삶 전체를 소모하지 말라. 단순하게 사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욕망이 단순하면 충족시키기도 쉽고 중요한 것들을 즐길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한 행복의 비결이었다. 아주 일리가 있는 말이다.
P041
그렇다면 에피쿠로스가 던진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P043
우리는 보통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그 몇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두고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시간에 대해 왜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죽음 이후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영겁의 시간에 대해 그토록 신경을 써야 하는가? 우리의 생각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을 볼때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게임, 유튜브, 잦은 술자리 등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나도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활용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의 나는 주어진 시간이 많다는 것을 느끼며 산다. 남은 30년의 시간동안 재미와 의미 모두 찾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먹을수록 선택과 집중의 능력은 더욱 커진다.
P049
키케로처럼 팔방미인이었던 세네카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극작가, 정치가,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가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 시간을 얼마나 헛되이 사용하는가를 문제로 보았다. 역시나 세네카에게도 인간 조건의 피할 수 없는 측면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인생이 짧다고 화낼 게 아니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인생을 두고 그러는 것처럼 천년의 시간도 쉽사리 허비할 거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인생이 너무 짧다고 불평할 것이다. 사실 인생은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다.
반면에 중년의 내가 느끼는 경험의 값어치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내는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파도에 시달리며 생존한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항해의 목표는 도착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나는 물 위에 떠있고자, 생존하고자 하는 생각만 했기에 파도가 낮을 때에도 목표를 향해 나아갈 생각을 안 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경험의 귀중함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여러 경험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P050
배를 타고 출항했지만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닌 사람은 항해 중이었던 것이 아니다. 거친 파도에 시달렸을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시간을 찾지 못한 채 사건들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고 통제 불능 상태에 있는 것은 진정한 삶과 사뭇 다르다.
볼테르의 상대적인 관용과 열린 자세에 대해 유명한 명언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게다가 실천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정치적인 사상과 경제적인 여러 의견들이 과열되어 있고, 효율성을 강조하며, 성과(결과) 중심적인 우리의 환경에서 구성원들에게 좀 더 필요한 덕목임은 느낄 수 있었다.
P131
"나는 당신 말을 몹시 싫어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는 사력을 다해 옹호할 것이다."
이는 당신이 경멸하는 의견이라고 해도 들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강력히 옹호한 입장이다.
P134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P135
그의 가장 인상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장 칼라스를 옹호한 것이다. 장 칼라스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고문당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칼라스는 분명 무죄였다. 그의 아들은 자살했지만, 법정은 증거를 무시했다. 볼테르는 간신히 판결을 뒤집을 수 있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불쌍한 장 칼라스를 위로할 기회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공범들'은 석방되었다. 볼테르에게는 이것이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것'의 실제 의미였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다. 내 생각을 읽은 듯한 글이 마음에 들었는데, 마지막에 저자의 비판을 보고서, 역시 사람의 생각은 완전한 부분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과 주장이 혼용된 인문학 서적들을 볼때 느끼는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말이어서 좋았었다. 그런데 자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주장이라니... 그것을 동조한 내 생각도 서로 뱀꼬리를 물고 먹어가는 두 마리 뱀처럼 자기모순이었다는 것이 조금은 씁쓸했다.
P256
(1) 그 문장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
(2) 그 문장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P257
만약 그 문장이 정의에 의해 참이지도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지도 않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에이어는 단언했다. 아주 단순했다. 에이어 철학의 이런 부분은 데이비드 흄의 사상에서 직접 차용한 것이다. 흄은 이런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철학 저서는 '궤변과 착각'밖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반농담처럼 제안했다. 에이어는 흄의 사상을 20세기에 맞게 고친 셈이었다.
P267
에이어의 논리실증주의는 안타깝게도 자기 파괴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이 이론은 그 자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첫째, 이 이론은 정의에 의해 참인지가 명백하지 않다. 둘째, 이 이론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관찰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자체 기준으로 볼 때 에이어의 논리실증주의는 무의미하다.
과학철학자인 포퍼가 좋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반증 가능한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좋았던 적이 있었다. 기독교 사상, 프로이트, 마르크스처럼 선언적인 진리, 반대의견과 서로 간 합리적인 논쟁이 불가한 선언적 진리에 대해 답답했었는데, 이에 대해 이 책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을 듣고 나니 과학 논리(철학)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장착하게 만들고, 유사과학을 분리해낸 포퍼의 개념 정리가 고마웠다.
P289
많은 철학자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과학이 귀납에 의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면 귀납의 문제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과학이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추론 방식에 바탕을 둘 수 있는가? 과학의 발전 방식에 대한 포퍼의 견해는 이런 문제를 깔끔하게 피한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귀납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가설, 즉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정보에 입각한 추측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모든 기체는 가열하면 팽창한다'라는 진술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단순한 가설이지만, 실제 과학은 이 단계에서 엄청난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한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곳에서 발상을 얻는다. (중략)
그런 다음 과학자들은 이 가설을 시험하는 방법을 찾는다. 이 경우에는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기체를 찾아내어 가열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험하는 것'은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설이 그것을 반증하려는 시도를 이겨낼 수 있는지 증명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마찬가지로 '모든 기체는 가열하면 팽창한다'는 가설을 무너뜨리려면 가열했을 때 팽창하지 않는 기체를 하나만 찾아내면 된다.
만약 한 과학자가 어떤 가설을 반박한다면, 즉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결과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바로 그 가설이 거짓이라는 지식이다.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이다.
2500년의 기간의 철학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작가의 노고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한 권에서 40명 이상의 철학자를 몇 페이지 만을 할애하여 요약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축약한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고, 전체의 개념을 설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짧은 기간에 읽어낸 나 자신과 양재나비 독서모임 선배님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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