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이 밝았다. 성탄절을 맞이하면 산타클로스와 선물이 생각나고, 영화 '나 홀로 집에'도 생각나지만, 나는 성가대가 생각이 난다. 약 25년 전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살 때 가좌동 성당의 청년 성가대를 다녔다. 결혼과 동시에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되었고, 지금도 성당을 다니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28~30세로 한참 즐거움이 넘치던 시기였다. 취직은 했고, 결혼은 아직 안 했으니 넘치는 것이 시간이었고, 월급을 받으니 돈은 풍족(?)했던 시기였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의 선택 이후 가족들이 영세를 받기 시작했고, 나도 영세를 받았다. 남가좌동으로 이사 후 성당에 적응하려면 단체를 들어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무작정 성당에 가서 보좌신부님을 졸라서 단체를 하나 추천받았다.
누나와 나는 같이 성가대에 배정받았고, 입단 시험을 치르듯이 노래도 불렀다. 누나는 성가 중에서 골랐고, 나는 트로트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1~2번 참석하고 난 뒤 나가지 않았다. 나중이지만, 그 당시 노총각이던 지휘자 형님은 왜 누님이 안 나오냐고 내게 상세히 물어보았다. 나는 첫날부터 형들, 동생들과 어울려 뒤풀이를 즐겼다. 술과 사람을 좋아했기에, 편안한 형들과 동생이 있고, 여자단원들이 많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임의 형태에 푹 빠져들었다.
◆ 어리버리 성가대 활동 추억
성가 연습은 매주 수요일 저녁과 일요일 저녁 미사 후에 각각 2시간씩 했다. 물론 저녁 미사 전 1시간은 미리 모여서 미사곡을 연습했다. 어려운 곡은 수요일 미리 연습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2번씩 연습을 하는 것은 청춘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나는 연구소에 다녀서 규칙적인 패턴이었고, 특별한 야근만 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었지만, 친구들과 약속이 많은 단원들도 있고, 회사일로 늦어지는 단원도 있었는데 늦게라도 꾸준히 참석을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기대감을 갖고 참석해서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하고, 끝나고는 맥주 한잔하면서 신나게 떠들고 나서 헤어지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휘자 형님을 비롯 몇몇 남자들은 2차로 가서 12시를 넘기는 것도 다반사였다. 나야 악보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저 따라 부르기만 하고 있었다. 어느 곳이든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 한 명씩은 파트별로 있어서 나머지는 쪽수를 채우는 그런 작은 성가대였다. 난 노래 부르기도 아주 좋지만, 뒤풀이에서 떠드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6개월 지난 뒤 단장이 되었다. 통상 1년 지난 다음에 단장이 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예외적인 경우였다. 인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조그만 동네이니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당시에는 통상 남자가 단장이 되는데 성가대의 특성상 여자단원이 많았다. 남자단원이 있지만 나이가 어린 경우도 많았기에 남녀 선임들이 알아서 정해놓고 나를 추천했다. 나는 내막도 모르고 관례처럼 경선 수락을 했는데, 상대는 과감하게 경선불참을 공표했다. 이건 완전히 공산당이고, 답정너였다. 나만 내막과 그들의 협의사항을 모르고 있었다.
단원들 추천(?)에 따라 나이 어린 임원들을 임명(?)하고나서, 임원들을 비롯하여 단원들과 더 많은 시간을 어울렸다. 이젠 토요일까지 성당 단원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닌 여러 선임 단원들이 방향을 잡아주면 나는 그저 그 방향대로 가자고 이야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 일들은 단원들이 알아서 차근차근 처리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이었던 것 같다.
그중에 큰 행사가 성가대 발표회였다. 연말에 성탄절 부근 토요일에 성가대 발표회를 하기로 했다. 내가 입단한 연도에는 발표회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발표회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단장으로서 주관이 된 것이다. 지휘자 형은 여름부터 연습을 시켰고, 노래를 준비해 갔다. 좀 더 성공적인 발표회가 되기 위해 마지막에는 피아 성가대 OB 단원들도 불러서 선수 보강을 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준비한 발표회를 마치고 나자 한해도 끝났고, 임기도 끝났다. 후련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빠짐없이 새벽까지 마시고 병원을 가본 적 없고, 건강 검진하면 아무런 이상 증상이 없었던 주완 형이 그랬다. 맥주를 3천까지 마시던 지휘자 아오스딩 형도 술을 마셔야만 더욱 건강한 것 같았다. 대두(?) 3 총사의 막내인 나로서는 그 2명을 따라다녀야 했고, 동생들도 참석을 하기에 도망가기 어려웠다.
주말에는 임원단들과 어울렸다. 단원들과 경마장도 가봤고, 등산도 가봤다. 명지대에서 농구를 하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사생활이 없어질 정도로 같이 지냈다. 결혼 전의 청춘들이 모이는 곳이니 커플들도 생겨났고, 대다수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성가대에서도 결혼을 앞둔 3쌍의 커플들이 있었다. '노래하고, 마시고, 연애하라'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모태솔로 같은 분위기였다. 그저 사람들이 좋아서 나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만 그랬나?)
나는 그 당시에도 회사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돈을 벌어야 하고, 승진을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성당 사람들은 그런 욕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좋은 직장에 취직한 사람들도 드물었고, 공부를 잘한 사람도 드물었다. 나는 삐뚤어진 생각으로 우월감을 가졌지만, 그들은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신앞에서 겸손하고, 친구들과 다정하게 지내고, 모임에 충실한 것이 인생의 가치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생각을 별로 안 했을 수도 있다. 발버둥을 쳐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개인의 후회를, 타인에 대한 증오감을 표출하기 쉬운데 이 모임은 소박하면서도 즐거웠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모임은 아마도 종교적인 생활이 몸에 밴 탓도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겠지만 내가 눈치가 없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은 좀 다르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곳 출신들은 다자녀 가정이 많다. 평균이 2명은 넘고, 보통 3명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피임이나 낙태를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다자녀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삶에 대해 건강하고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아주 좋아진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체득한 삶의 자세인 것 같았다.
20대에 그들이 지닌 인생관이 그 후로도 계속되는 것 같다. 나는 그대로일까? 아니면 계속 변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당시에도 나는 이대로는 살기 싫다고 생각한 것 같다. 좀 더 자신에게 엄격하고 어려운 숙제를 감당해야 한다고 느낀 것 같다. 그 뒤로 좋아진 것은 거의 없으니 계속 삶에 대한 부정적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 삶의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은 많이 했지만 만족감은 별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성가대의 몇몇 친구들은 꾸준히 노래를 계속하고, 가족들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느낀다. 나와 달리 내 아이들의 세대에는 더욱 행복하기에 대해 고민이 많을 것이다. 두 딸들이 행복이란 소소한 일상의 지속과 감사함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소박하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그들이 삶이 다시 생각나는 성탄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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