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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언제쯤 노인(老人)이 될까?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와카타케 치사코 지음, 정수윤 옮김 

최근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우선 소소한 다른 일들을 많이 벌여서 책 읽는 시간이 부족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들을 소화하는 것도 벅찼다. 그중에는 마음에 들어오는 책이 거의 없었다. 이럴 때는 나의 감정을 자극해주는 소설이 좋다는 것을 것을 알고있다. 아침마다 접하는 시 한 편은 감성훈련으로는 좋겠지만, 내 마음속을 자극하는 울림이 생기지 않았다. 나를 움직여 줄 책 한 권이 필요했다.

일주일 전 평소처럼 책을 몰아서 주문하였는데, 그중에 제일 얇고, 제목이 끌리는 소설을 골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이력이 특이했다. 1954년생 이와테현 출신 주부였다가 55세 남편 사별 후 소설 강좌 들으며 8년 후 소설 집필하고 63세에 최연장 문예상 수상을 한 여류작가였다. 내 나이가 아직 55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비처럼 예쁜 노년의 삶이 될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소설을 읽다가 아내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시장에서인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어떤 억울하고 화가 난 여자분이  "나도 남편 있는 여자예요!"라고 절규하듯 소리치는데,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 심정이 이해될 듯도 싶다고 했다. 나도 물론 이해는 좀 안 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중년나이 이상 연배의 삶이자 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와카타케 치사코라는 노작가는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홀로 일어나 독자들에게 고독한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 소설을 쓴 것이다. 

(Ora Orade Shitori egumo)
주문을 외듯, 이 구절을 읊어 본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의 도호쿠 사투리를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자,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영결의 아침]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
겐지를 사랑한 저자는 생애 첫 소설의 제목을 이 시구에서 가져왔다. 더없이 아끼던 여동생의 주검 앞에서 애끓는 슬픔을 마주하며 쓴 시. 한때 뜨겁던 육신은 식어가고, 산 자는 영원히 알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여동생이 읊조린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갈게요. 생의 마지막 입김과도 같은 이 시어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작가의 전혀 다른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선물과도 같다. 반평생을 주부로 살다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마주하며 쓴 소설. (P164, 옮긴이 정수윤의 글)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고, 경험이 많아지면 좋아지는 것도 있다.  세상만사에 대해 크게 동요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 혹은 감성적으로 둔감해지는 것도 있지만, 실제 여러가지 풍지평파를 겪어본 경험으로 그보다 큰일이 아니면 좀 더 참을수 있고, 차분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나름 힘든 시간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더 힘든 일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예상도 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한다고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강해진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큰 파도에 한번 잡아먹혀 본 사람이다. 뒤따르는 잔물결 따위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저 기도하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P024)

내게 늙음이란 의미는 육체적 기능의 약화였다. 근력의 감소와 지연되는 회복력은 인내심과 적당한 포기로 대응이 가능했다. 청력과 시력의 감퇴로 미묘한 대화의 어감이나 대화의 맥락을 눈치못채는 답답함은 나름 이해심과 겸손함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대응하면 된다고 했는데, 주인공의 지독하고 해답이 없는 외로운 현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아직도 젊은 상태이고 그리고 무지한 상태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긋두 몰랐아. 융모 돌기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랐다. 젊음이란 지금 생각해보면 무지와 다를바 없다. 모든 건 스스로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담 늙는다는 건 경험의 동의어일까. 안다는 것과 같은 뜻일까. 그동안 모모코 씨는 늙음은 잃는 것,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앎과 경험이 쌓여 가는 게 늙음이라는 생각이 모모코 씨에게 약간의 희망이 된다. (P031)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살면서 느낀것이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라는 좌우명이다. 진부하면서 동시에 이견을 달지 못하게 만드는 좌우명이며 경험담이지만, 더 많은 경험을 한 선배들의 이야기는 나를 입다물게 만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는 것을 나는 아직 제대로 아니 조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겪은 외로움은 앞으로 다가올 노년의 삶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막연하게 추측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건 발견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의 끝에서. 어쩌면 난 이걸 발견하기 위해 평생 부지런히 살아온 게 아닐까 싶은 무언가. 아무리 진부하고 흔한 것이라 할지라도 현장에서 시간과 공을 들여 획득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마디. 옛 사람의 노래처럼 한이 서린 한마디가 있어서, 그게 또 그 사람을 수놓는. 모모코 씨의 경우엔 이 한마디가 있다. '인간은 어떤 삶을 살건 고독하다' (P056)

모모코는 변해버린 가족관계와 혼자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떠나버린 남편 슈조를 그리워 한다. 그리곤 마침내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신의 여러 자아와 대화를 하게되며, 남편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고독한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슈조, 우리는 길 위의 사람들이야. 무슨 수를 써도 현재를 사는 나라는 한계, 너라는 한계에서 도망칠 수 없어. 그래도 인간은 변해 간다. 조금조금씩. 그러니 다가올 미래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남자와 여자의 삶이 존재할 거야. (중략)
결혼이라는 형태는 벌써 사라지고 있는 건지두 몰라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게 기본이라구 생각해. 거기에 느슨하게 이어진 인간관계가 있는 거지.
(중략)

창문 너머 수평선 저편으로 펼쳐진 은하, 그 안의 작은 별을 주시하는 무수한 남자들 속에서, 나는 슈조를 찾아내고 싶다.
그러니 슈조도 머나먼 지구를 향해 탄성을 지르는 날 찾아내주면 좋겠다.
슈조, 보고 싶어. (P096/097)

떠나간 남편의 무덤을 향해 머나먼 길을 직접 걸어가기로 한다. 지내온 자신의 모습과 남편과 지낸 삶을 생각하며 노인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며 힘든 길을 꿋꿋히 걸어간다. 남편 없는 혼자의 삶이지만 외로움을 버티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슈조가 준 혼자만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 그런 생각으로 살았지만 가끔씩 그게 너무 버거워. 혼자는 고독이 길동무야.
옆에 있는 여자에게 그렇게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모르는구나. 세월이 쌓여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있어. 그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모모코 씨는 안다.

남편의 무덤가로 걸어가는 길은 너무도 힘든길이었다. 수많은 내면과 모모코의 인생 전체에 걸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든 여러 연령대별 자아와 이야기를 하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길을 걸어가서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다. 그리곤 이미 잠들어 있는 남편과 마주서는 것이 아니고 나란이 건너편 하늘을 같이 바라본다. 

무덤에 와도 모모코 씨는 손 모아 인사를 하진 않는다. 무덤 옆에 바싹 다가앉아 무덤에서 바라다보이는 하늘을 함께 바라볼 뿐이다. 각각의 모모코 씨도 제각기 진을 치고,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비석 위에 올라가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다.
(중략)
아.
일어서면서 깨달았다. 이 웃음의 의미.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의 의미.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니었어. 붉은 것에 감탄할 줄 아는 내가 아닌가. 아직 맞서 싸울 수 있다. 나의 생은 이제부터다. 터져나오는 웃음은 터져 나오는 의욕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P138/139)

치명적 질병중에 암이 심혈관 질병보다 더 낫다고 한다. 당사자와 가족에게 받아들이고 정리할 시간을 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삶이 지속되지 않는한 늙음이란 인생이 주는 일종의 선물일수도 혹은 형벌일수도 있다. 죽음에 조금씩 다가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국 홀로 된다는 것과 조금씩 가라앉는 육체와 정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게다가 늙음이란, 비탈을 구르듯 가속도가 붙으며 확 늙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폭삭 가라앉는 것처럼 늑음이 찾아오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 차라리 그렇담 좋겠는데, 그렇담 좋겠아. 늙음과 죽음 뒤에 펼쳐질 세상은 제아무리 모모코 씨라 해도 전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게 세상에서 젤루 재미잇는 일이니, 이를 충분히 탐구하고 음미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일이 되리라.(P144)

옮긴이는 이소설의 작가에 대해 외롭고 힘들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이해하며, 그것을 넘어서 극복하고,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당신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도 이런 것일까. 모두를 안고 혼자, 혼자가 되어 모두를 기억하며,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맞서는 것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상태로. 이 책도 결국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늙음, 당신의 절망, 당신의 고독, 혼자 뒤떨어진 것 같고, 혼자 소외된 것 같고, 혼자 길을 잃은 것 같은 당신에게 말하나니, 우리는 모두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P167)

소설의 처음 부분은 좀 불편했다. 오래된 주택에서 노인 혼자서 외롭게 지내는 모습이 우울하게 그려졌다. 그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라고 감정이입이 충분히 되었나 보다. 실제로 그런 삶이 실감 나고 고통스러운 것은 겁이 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불편이나 신체의 변화에 대한 적응은 조금씩 해나가고 있었는데,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고독한 삶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은 사회적인 복지가 발달되어 정도가 덜하겠지만,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집에서는 철저히 혼자가 될수 밖에 없다. 공동생활도 마찬가지로 고립감과 외로움은 늙을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나는 무슨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나가서 운동하고, 한두 개의 사회적 모임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결국 다시 철저하게 혼자가 될 것이다.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아껴줄 가족이 결국에는 없어질 것이다.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그랬던 것처럼 관계의 상실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할머니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 한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니 겁먹지 말고, 상심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사회적인 애정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이를 극복하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고 있다. 나는 인생의 끝에서 절망하지 않고 혼자서 살아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도록 권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내 아내다. 아내는 내가 없으면 밤에 잠을 잘 못잔다. 평소에도 내가 밖으로 혼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익숙하지 않은 아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아내에게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평균적으로 10년 정도는 가장 힘든 시기에 남편없이 혼자서 노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었다.(우리 부부의 가족력으로 본다면 혼자의 삶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 이 소설의 재미중 하나는 사투리로 쓰인 것이다. 작가는 도호쿠 사투리를 이용하여 글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살리기 위해 강원도 사투리 구어체로 글을 번역했다. 강원도 사투리를 잘 몰라서 개인적인 감흥은 조금 약했지만, 사투리가 주는 느낌은 좀 더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