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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독서

평범하면서 행복해질 용기에 관하여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최근 알프레드 아들러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성장판 독서모임에서 기시미 이치로의 책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을 4월의 주제도서로 정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었고, 그전에 사놓은 <미움받을 용기>, <미움받을 용기 2>, <아들러 심리학 입문>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평소에 페친 정석헌 님이 <미움받을 용기 1,2>를 극찬해서 사놓은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정석헌 님은 책의 본문 대다수에 밑줄을 쳤다고 보여준 적이 기억났다. 

성장판 독서모임을 매달 참석하지만, 책을 읽고 발제를 철저히 하는 모임의 특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책의 핵심도 요약 못하고, 그렇다고 재치 있는 해석도 못하는 나를 위안하는 나름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을 읽고 나서는 느낌은 좋았지만, 빠른 차를 타고 도시 관광을 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집에 사놓고 읽지 않았던 <미. 용. 1,2>를 읽었고, 그리고 혹시나 해서 전에 대충 읽은 <아들러 심리학 입문>을 다시 읽었다.

제일 친절하게 다가온 책은 <미움받을 용기(1)>였다. 역시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를 지속할 만했다. 나는 이 책이 심리학 입문서인지, 철학서 입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자기 계발서였다. 전부터 자기 계발서를 읽고 생활과 의식의 변화를 시도하다가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 같았다. 평범한 삶에서 비범한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책을 지난 10년 넘게 읽었다. 그런데 '평범한 삶은 과연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기시미(아들러)는 이런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성장판 주제도서인 기시미 이치로가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서 제시한 아들러의 심리학의 3가지 용기는 1) 미움받을 용기, 2) 평범해질 용기, 3) 행복해질 용기 세 가지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워서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아들러 심리학의 요점정리를 해놓은 것이므로 다시 보면 핵심만 복습하는 것 같았다. 

P019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들러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019>

절대적인 인생의 의미는 없고, 각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요즘 세상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생각해보면 막막하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목표와 방향도 찾을 것인데, 인생의 소명을 찾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들러는 그렇지만 제일 먼저 이 말로 시작했다. 이것에서 막히면 어떤 책을 읽어도, 강의를 들어도, 설법과 말씀을 들어도 안된다.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게는 '평범해질 용기'와 다시 연결되었다. 

P036 비둘기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속을 나는 게 아니다. 비둘기가 날 수 있는 것은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기가 사실 비둘기를 날 수 있도록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이 없는 곳에 자유는 없다. 저항이 있기에 자유가 존재한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036>

아들러는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주위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극복할 때 진정한 자유라고 한다. 맞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내가 술을 끊을 때 주위의 저항이 좀 있었다. 기존의 사교 관계 지형도도 바뀌고, 연락이 저절로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 내가 편안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점을 나는 알고 있기에 '미움받을 용기'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고, 마음속에서도 어느 정도 체득을 하고 있었다.

기시미 이치로가 정리한 행복한 삶을 살기위한 아들러의 행동과 심리적 목표는 각각 2가지였다.

아들러 심리학의 목표
1. 행동의 목표
   1) 자립한다.
   2) 사회와 조화롭게 살아간다.
2. 심리적 마음가짐
   1) 나는 능력이 있다.
   2) 사람들은 나의 친구다

이 부분에서 아들러(기시미)는 자녀 양육의 태도에 대해 많은 언급을 했다. '자립을 하면 되고, 그리고 나름 사회에 잘 적응하면 된다'라고 했다. 자립을 위한 심리적 기초로 스스로 능력이 있고, 사회와 어울리기 위해 긍정적 사회관(친구관)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여기서 SKY나 '사'로 끝나는 직업에 대한 언급은 분명 없다. 일본이든 우리나라든 자녀 교유에 관심을 넘어 집착하는 부모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얼굴이 뜨거웠다. 조금이라도 등급(?)이 높은 대학으로 진학을 시키고 싶은 내 맘을 꾸짖는 것 같았다.

딸들이 20세가 넘어가면서 독립을 하는 것이 내게는 이제 눈앞으로 다가왔다. 경제적 독립, 심리적 자립, 지속적인 성장환경 등이 딸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지속적인 성장환경을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유명한 대학과 좋은 직업은 그를 위한 강력한 토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조금씩 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러의 목표를 보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했다.

딸들의 인생보다 먼저 내 인생을 봐야 했다. 부모란 걸어가는 길 자체보다는, 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부터 다시 봐야 했다. 50이 넘어해 놓은 것이 없어 초조했다. 아쉬웠다. 잘해서 멋진 것을 만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근데 그게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60, 70이 넘어서도 몸짱 같은 몸매와 체력을 보여줄까? 책을 한두권 써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려줄까? 이제부터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해볼까? 그런데 그런 것은 아들러가 이야기한 인생의 목표와는 전혀 방향이 틀렸다. 

인생의 목표중 3가지는 이미 내가 달성한 것이다. 한 가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는 것이다. '나는 능력이 있다'라는 부분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3가지를 달성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바로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주목받고 싶은 욕망과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강한 것이다. 그것이 마음속에서 그리고 행동으로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욕망이 딸들에게도 투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주목받고 칭찬받은 삶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고통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건 권장할 만한 삶이 아닌 것이다. 나는 그런 주목받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그 고통을 모른다. 그저 그런 삶을 동경할 뿐이다. 그런데 아들러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능력과 남들과 사이좋게 어울릴 능력과 마음가짐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평범해질 용기'를 가지라고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들러는 간단하게 대답했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미움받을 용기, P287> 
자립이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만약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 해결해나간다는 뜻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047>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자식들에게 당연하게도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아이들도 스스로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었을 텐데 내가 좀 더 푸시를 하고 있었다. 사이는 좋을 수 없었다. 말로는 아무것이나 상관없다고 했지만, 행동으로 무의식으로 충분히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바탕이 있는 한,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좋아질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평범해질 용기'를 가져야 했다. 내 인생의 평범함을 추구할 필요가 강해졌다.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다.   

감정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사용된다.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한 슬픔이라는 감정은 상대로부터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089>

그리고 '행복해질 용기'에서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지금 평범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길을 받아들이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뭐 이런 평범한 말이 다 있나' 했다. 슬프게도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그걸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그것에 대한 자기 수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근데 그걸 자꾸 잊는다. 나이를 먹었고 이젠 뼛속까지 느낄 때가 되었는데 자꾸 잊는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먼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바로 '자기 수용'이다. 아들러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라고 말했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156>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오늘 내가 하는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생 행복해질 수 없다."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157>

내가 가지지 못한 삶을 접할 때가 간혹 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회사의 임원으로 승진한 분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함부로 그분들의 삶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내 관점으로는 대다수가 가족과의 삶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가족들과 많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직장 내의 경쟁구조에서 많은 관심과 시간을 업무에 투자해야 했다. 이는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52시간제(40시간) 이후 가족과의 저녁시간이 3시간 정도 생겼다. 그중 한 시간은 식사와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2시간은 둘째와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다.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도 빠듯하고, 가족 간의 공감시간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린 부모들은 어떠할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갖기가 쉽지 않다. 많은 부분에서 극도로 효율적이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이제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책을 좀 더 읽고, 운동을 하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해질 용기만 가지면 된다. 나는 그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의 다름을 인정하고, 역시 그 자체로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고,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가져가야 한다. 아들러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근데 나부터 하라고 한다. 바로 지금부터...

"누군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사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내 조언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시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말고요."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P176>

우리나라도 아들러 전문가가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