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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아름다움

생선장수의 아이들이 늙어간다.

며칠 전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딸들이 저녁식사 이벤트를 만들었다. 큰딸은 아내가 떡을 좋아해서 카네이션 떡케이크를 준비했고, 둘째 딸은 온 가족이 좋아하는 샤브샤브 뷔페를 예약하고 식사 대접을 했다. 나는 어차피 주머닛돈이 쌈짓돈일 것 같아서 의심을 했지만, 큰애는 알바로 모은 돈이고, 둘째는 설날 세뱃돈을 쓰지 않고 모은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하여간 아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고 모든 가족들이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우리 부부도 며칠 앞서 처가 식구들과 장모님을 모시고 식사 모임을 가졌고, 그 며칠 전에는 장모님과 아내는 별도의 데이트 시간을 가졌다. 장모님은 아주 흡족해하신 것으로 들었는데, 평소 무척 바쁜 딸과 오랫만에 데이트를 하니 기분 좋으신 것 같았다. 3종 세트도 당신의 기분을 약간 더 좋게 만든 것 같다. (식사, 쇼핑, '봉투 봉투 열렸네'). 아내는 장모님이 좋아하시니까 오히려 본인이 더 기분 좋은 것 같았다. (물론 그날 잠들기 전 집행 예산을 혼자 조용히 확인해본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부모님이 모두 안계시니 별다르게 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 생각은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다 보면 보통은 꿈에 한 번쯤 나타나시는데 요즘은 아예 어머니 꿈을 꾸지 않는다. 아버지는 떠나가신 지 20년이 넘었고, 평소 자유로운 의식과 생활로 우리에게 많은 집착을 남기시지 않았는데,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느낌은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다. 상실의 고통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도 성인 자식을 둔 중년들이니 그런 느낌들이 일상에 지장이 되지는 않지만, 어머니 생각을 하면 누나 표현대로 '마음이 아렸다'. 

※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2013년 10월 어머니가 떠나가신 이후로 3년간 제사 혹은 차례시 어머니 영정을 보기가 힘들었다. 평온한 감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가 꿈에 나타나시면 나는 새벽에 깨어나 잠을 못 자거나, 잠꼬대를 하는 나를 아내가 놀라서 깨웠던 적도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내에게는 사업을 할 때 이런저런 깨알 같은 사연을 들어주고 맞장구 쳐준 친구, 두 딸의 양육과 깔끔한 살림을 맡아주던 엄마, 절약정신과 사람 관계 간에도 단호한 결단을 보여주시던 스승 같은 존재였다.  가끔 우리 부부는 둘이 같이 술한잔 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어머니 추억으로 귀결되어 눈이 벌게지곤 했다.

큰딸이라서, 누나를 대학을 보내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신 어머니를 미워하면서도, 이후 어머니를 험한 환경에서 평생 지키려고 마음먹은 누나는 나보다 더욱 아린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결혼후에도 어머니 근처에서 살려고 노력했고, 자주 만났고, 어머니가 수시로 의지했던 누나는 이민을 가면서 많이 울었다. 캐나다에서도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많이 울었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도 마음 한편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다고 표현하신 기억이 난다. 어머니에게 막내인 여동생은 평생 안아주어야 할 아이였던 것 같았고, 언니 오빠가 있어서 그나마 조금은 안심하신 것 같다.

어머니가 떠나가신 것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고, 나도 이젠 50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런 감정이 나오는 것이 어떨때는 좀 한심스럽기도 했다. 망자에 대한 회한은 결국 본인의 기억 방식이거나 집착이라는 말을 몇 번 들은 것 같은데도 정작 마음 정리가 잘 안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왜 자꾸 붙들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았다. 하나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다.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좋은 환경을 잃은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잘해 드리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는 후회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도 자 자랐고, 이제 우리 부부는 좀 더 안정적이 환경에서 지내고 있어서 어머니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도 잘 지내고 있고, 결국 어머니에 대해 잘해 드리지 못한 미안한 감정이 큰 것 같았다. 근데 사실을 바꿀 수는 없고, 정신승리 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았다. 과연 내가 어머니께 못 해 드린 것일까?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심한 불효자는 아닌 것 같다고 위안을 해본다. 누나나 여동생 그리고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머니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신 것이라면 무엇일까?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625 전쟁 시작 전에 소학교(초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었지만,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여자아이는 학교를 보내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새어머니(지금 외할머니)의 조언을 받아, 소 몰며 밭을 갈던 어머니의 할아버지 앞에서 시위를 하며 농사일을 방해했다고 한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끝에 증조할아버지가 욕을 하며 반승낙을 하자마자 바로 학교로 뛰어가서 교감 선생님께 학교에 입학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후 전쟁통에 2~3년을 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1개월 이내에 2년을 월반하여 4학년이 되었고, 어머니를 무등 태워 같이 다니던 서너살 위의 오빠들과 같이 배우며 급장(반장)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은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유전적 요소가 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학교를 파하고(마치고) 집에 와서 배운 것을 암송 확인하고 나서 놀았던 집안 분위기는 학업성취에 제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주 반복하신 '성실한 직장인' 그리고 '내 새끼들은 내가 잘 키울수 있다' 이야기가 있다. 잘났든 못났든 성실하게 월급 받으며 가족들이 합심하여 알뜰하게 절약하면 점점 좋아져 잘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배우자나 형제/자매가 못살게 굴어도, 주위 환경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내 한목숨 걸고 내 새끼들은 내가 잘 키워야 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삼 남매와 아내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고, 비록 부자나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 내 새끼들은 내가 잘 키울 수 있다.

어머니는 30대 초 ~ 70대까지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우리를 잘 키우기 위해 생선장수, 요구르트 배달, 가사도우미(파출부) 등 험하고 힘든 일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좀 적극적인 생활을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도 시장에는 텃세가 있으므로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하루 종일 다녀야 겨우 팔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과 벤치마킹을 하고 판매지역이나 물건에 대해 검토를 하셨다고 한다. 고급 주택가에서 잘 팔리고, 고급 생선이 잘 팔린다고 했다. 이문(이윤)은 고급 물건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새벽에 재빨리 고급 생선을 머리에 이고 고급 주택가를 제일 먼저 돌면서 하루에 2탕을 뛰셨다고 했다. 

40대에는 장사하시던 느낌으로 보행자의 통행이 많은 골목 분기점에 있는 주택을 사서 일부를 점방(가게)으로 개조하여 장사를 하시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동네가 좋지 않아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고 반대하셔서 무산되었다. 아버지가 물러섰다면 어머니는 초창기 복부인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빌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큰병치레 등으로 체력이 약해지신 후 가사도우미를 하실 때에도 어머니를 장기간 불러주신 고객분들이 대다수다. 아주 까다로운 집이었지만, 어머니는 눈치만 보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만족시켰고, 빨리 하셨기에 근무시간도 비교적 짧고, 임금도 다른 분들에 비해 높았었다. 실제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에게 비결도 많이 배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다. 고급 서비스로 까다로운 고객을 만족시켜 많은 이윤을 얻는 방식이 비슷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어머니 고향을 같이 다녀온 적이 있었다. 보통 외가에 들러 인사부터 하는 것인데 그날은 외가를 다녀가지 않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외종 숙부님과 같이 산으로 들어가서 어머니 친모(내 외할머니)의 무덤을 정리했다.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 내용만 알고 있던 친모의 무덤을 정리하기 위해 내려갔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제사 관련 부담을 자식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관리가 안되어 욕을 먹거나, 마음의 부담을 지고 사느니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실제로 나는 장손이지만 어머니의 강력 주장으로 조부모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숙부님 댁에서 지낸다.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시에 당신의 건강을 이유로 집안 제사를 천주교식 연미사로 변경하겠다고 선언하셨다. 나중에 두고두고 자식의 부담을 예상하신 어머니가 욕을(?) 먹고서 확실하게 처리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2008년 신장암이 발견되어 6년간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기간 동안 정신 못 차린 나를 대신해 아내가 정말 많이 고생했지만, 결국 제일 고생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투약을 하면서 힘드신 와중에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 아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환한 거실'이라고 했다. 투병 중에서도 깔끔한 거실과 화사한 화초를 키우시며 나름 가정을 지키시는 기둥 역할을 하신 것이다. 심지어는 병원에서 퇴원 및 진통제 처방만 진행하던, 돌아가시기 2주 전에도 침대에서 내려오셔서 당신 방에서 걸레질을 하시고 있었다. 의식만 돌아오면 주변을 정리하셨던 것이다.

※ 우리는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이다.

누나는 직장 입사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것을 시도하면서 배워왔고, 지금 적지 않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일을 해오고 있다. 역시 여동생도 졸업후 집안일에 안주하지 않고 최근에도 새로운 재무컨설팅 업무를 새롭게 시작하여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나도 잘 지내고 있고, 아내도 점점 성장하는 사업가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자식들에게도 모범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어머니가 추구하신 가족과 세상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일부씩 투영되어 있으며, 우리의 행동을 통해 조금씩 이루어 나가고 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난뒤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 삼 남매가 자식 2명씩을 키우고 있으니 결국 어머니의 자식들은 최종 6명으로 늘어났고, 내년이면 막내까지 모두 성인이 된다. 우리들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유산이면서 다시 또 우리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줄 유산이자 정신적 표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기리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길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이제 뒤돌아 보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걸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갈림길에 이르면, 과거의 이정표를 살펴보듯이 어머니의 삶을 반추해며 우리의 앞길로 투영시킬 것이다.  

2013년 3월 봄볕에 화초를 보살피던 어머니.

어머니 이 글을 쓰고 나서도 여전히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