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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아름다움

일상의 루틴이 흔들릴때

◆ 개근상에 관한 기억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전학을 간 것도 이유의 한 가지였지만, 저학년 때 감기로 결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은 전화기가 없었고, 설사 학교에 연락을 했어도 결석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졸업식 때 우등상, 개근상, 특별상 등등 하나도 받지 못해서 좀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상을 받아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 입학후 첫 토요일 아침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학교에서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격주 5일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초등학교는 5일제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업이 있었던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개근상이었다. 그 뒤로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바로 학교를 쉬었던 터라 그날의 느낌은 좀 허탈하기까지 하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개근상을 아주 높게 평가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살아가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딸에게 개근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아내와 딸의 강한 반발을 받고 철회를 한 적이 있다. 살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똑같은 일상을 하는 것이 삶의 다양성을 얼마나 핍박하는지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다.

중년 남자가 될 때까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학교와 군대와 회사에서의 역할만 하면 되었다. 가정에서 남자로서 지녀야 할 의무는 적었고, 남편과 아빠로서 지녀야 할 의무는 외면했다. 돈을 버는 역할로 80%는 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비슷했다. 조직과 모임을 위해 개인의 생활은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면 내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과 일상이 전개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들은 이런 것을 알고 있다. 아내는 나와의 혼인신고 및 주소이전 등의 행정절차를 혼자서 했다. 이미 신혼 때부터 남편을 귀찮은 일상 업무에서 열외 시켜 주었다. 애정을 바탕으로 편하게 대해주었지만,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내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 삶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것, 최선을 다해 아이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것, 이런 것들은 아내가 처리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형에는 좀 벗어나 있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실망하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에게 화를 내었다. 나의 낡은 프레임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노력하지 않는 아이들, 내 눈에는 내 딸들이 그렇게 보였다.

◆ 일상의 루틴을 만들다

30대 중후반부터 새벽운동을 시작했다. 20대부터 인생을 소진하듯 살아온 일상들을 반성하며, 먼저 체력부터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했다. 자기 계발 관련 책도 몇 권 읽었다. 회사에 도착해도 기분이 좋았고, 심지어는 어려운 상사에게도 밝고 힘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인관계 자신감도 붙었다.

이후 업무와 직장위치의 변화, 조직 내 인간관계의 재정립, 사내외 회식의 증가 등 독서와 운동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10년간을 스트레스를 받으며 다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처음 새벽 운동을 하던 시기를 잊지 못했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하기 위해 훈련을 하던 시기였다. 

추운 새벽에 얇은 옷을 입고 나가서 덜덜 떨면서 뛰다가, 마침내 숨이 가빠르고 가슴이 터질듯한 긴 언덕을 달려서 올라오면, 맞은편 산등성이에 빨갛게 해가 솟아오르고 그러면 나는 두 팔을 록키처럼 쭉 올리고 챔피언 포즈를 취했다.  '해냈다' 그리고 나는 '또 해낼 수 있다'라고 다짐하던 그 새벽 아침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5년 전에는 1년간 자전거로 통근을 했다. 새벽 4:50에 일어나 회사에 6:15에 도착했다. 퇴근은 일정치 않았지만 보통 9시 넘어서 퇴근했다. 집에 도착해서 잠을 잘 때가 되면 12시였다. 자전거 통근을 하던 1년간은 그 어느 때보다 의지력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수면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회사 업무에 장시간 집중이 어려웠다. 

근본적인 변화는 52시간(40시간) 근무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일과후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이들도 커서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게 온전히 투자해도 되는 행복한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직장환경과 가족을 핑계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책을 읽고, 운동을 시작했으며, 건강과 시간을 벌기 위해 술을 끊었다.  

독서모임 등 몇 개의 정기모임을 참석했다. 책 읽고 운동하는 것을 루틴으로 만들었다. 하루하루 미션을 완성했다는 기분이 좋았다.  '습관'앱에 완료 표시를 하고 6개월간 표시된 것을 보면서 좋아했고, 오픈 채팅방에서 서로 인증하며 격려해주는 생활이 좋았다. 감사일기를 통해서 감성적인 허무함이 커지지 않도록 보완을 하려고 노력했다. 

◆ 루틴이 흔들릴때

평일의 루틴은 그럭저럭 잘 진행되었다. 주말은 조금씩 긴장되었다. 특히 일요일에는 공적인 시간이 없고, 거의 나만의 시간이었다.  운동과 블로그 올리기 그리고 휴식이었는데, 2주간 블로그를 쉬었다. 달리기도 빼먹었다. 이러다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겁도 나고, 스스로에 대해 실망도 하게 되었다.

매일 일정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쉽고 작은 일이라도 하루도 빠지지 않는 것은 의지가 강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할까? 행위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하루 이틀 정도 미션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운동이 특히 그렇지만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주일 단위로 본다면 수요일 하루 정도는 자전거는 타지 않는다. 그것으로 큰딸과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강연을 듣는다.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금요일에도 특강들이 많다. 책은 일주일에 되도록 2권씩 읽고 싶다. 점차 잠자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피곤이 쌓이면 운동도 안되고, 책의 내용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살다 보면 컨디션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러나 운동 같은 경우는 강도를 낮추더라도 횟수를 채우면 되었다. 독서는 어찌 되었든 페이지를 넘기고, 메모를 하다 보면 체화의 정도는 덜하겠지만 진도는 나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와는 조금 다른 슬럼프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매일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루의 미션을 완성했다는 느낌은 좋지만,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것이지? 삶의 목적이 무엇이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나? 그런 삶이 맞는 것인가? 내게 어울리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런 내 궁금증을 누군가 다독여줄 사람이 있나?

기존에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실제로 내 감성을 안정시키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인데, 실용적인 느낌은 들지 않고, 아직 감정적으로 힘든 것을 못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제일 큰 이유는 아마도 아내와의 관계가 좋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아내와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독서와 독서모임은 아무래도 삶의 주제가 한계가 있다. 매월 한번 정도 만나는 모임들은 서로 얼굴 익히는 것도 버겁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친숙한 인간관계를 다시 구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중요하고 편안한 사람들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시간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은 부족한데 할 일들이 참 많다.

◆ 조금은 흔들리며 사는 것이 재미

삶에서 변동성은 필연이다. 기분은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우울한 날도 있지만, 실제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최악의 날에도 최고점과 최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점에 포커스를 맞추면 좋은 날로 기억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대한 사항만은 아닌데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각각의 감정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의 세부 감정의 총합이 그날의 얼굴의 표정과 의식으로 통합되어 표현되는 것이다. 내가 운동과 책 읽기가 부족했다는 것은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만나고, 영화와 음악을 듣고, 모임과 강연에 참석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표로 세운 것을 달성하려면 그런 시간은 걸림돌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요즘 고민하는 문제로 친구나 인생선배를 만나 고민상담을 하고, 격려를 받고 싶지만, 가족들과의 만남이나 책을 읽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 한두 번은 상관없겠지만 그런 것이 누적되면 기본적인 활동의 관성력이 떨어져서 정상적인 속도를 내기가 힘들다.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로 귀결되고, 삶의 가치관과 목표부터 다시 검토하게 된다. 이런 것이 계속 변한다면 갈지자로 걷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한다. 그런 게 인생이라고... 이런 종류의 고민은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지만 나선형 고민이 된다면 나름 의미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족과 같이 해야 하는 것들은 시너지가 생길 수도 있지만, 상충될 때도 있다. 예전에는 어린 자녀가 우선이지만, 이젠 내 삶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되새겨야 한다. 딸들도 조금씩 인식할 것이다. 스스로의 삶에서 부모의 역할과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내 삶을 다시 느껴봐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남은 30년을 생각하고, 준비하며 아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 흔들리는 것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다채로운 경험이 나를 더 재미있는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가을이 깊어진다. 나뭇잎은 매마른 색으로 변하고 있고, 초겨울 같은 날씨는 몸을 움추리게 한다. 수확할 것 없는 마음은 허전해진다. 여전히 외롭고 스산한 가을이지만 매년 반복되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한다. 나뭇잎을 버리고 수액을 줄이는 나무처럼 삶의 에너지를 어느 정도는 줄여야 한다. 모든 것을 하기에는 시간은 부족하고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다음주는 낙엽을 좀더 많이 만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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