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맛.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인생을 살았다. 봄가을을 예순 번씩 넘기며 살아보니 그나마 어렴풋이 인생의 윤곽을 그려볼 수가 있게 되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생은 뒤돌아볼 때 이해가 되는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은 앞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
“어때요? 살 만했나요?”
누군가 인생의 맛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테다.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겠지. 인생이란 아주 씁쓸한 것만도, 그렇다고 달콤한 것만도 아니었지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의 맛이 고작 어제 남긴 식어버린 카레를 무심히 떠서 먹는 맛이라도 말이다
장석주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이 책은 짧은 글들, 특히 블로그를 모아서 만든 책 같은데, 양념 간이 강하지 않은 식사를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사람에게 인생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름 성공도 해봤고, 모험과 사건 사고도 많았을 텐데, 결국 나중에는 식어버린 카레를 무심히 먹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 공감이 간다.
결국 이 책의 문장에서 내가 공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공감했을까? 씁쓸한 것만도, 그렇다고 달콤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 공감의 핵심이 아닐까? 내가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비로소 과거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다시는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나는 무지의 영역이니... 난 60대 노인의 경험은 아직 없기에..
가을이 저 안쪽에서부터 깊어간다. 바람이 분다. 아아, 다시 살아봐야겠다! 가을 오후, 마음의 근심들을 내려놓고 책을 읽다가 혼자 웃는다. 얼굴이 환해지고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무르익은 석류 열매가 터지고 야산 언덕에 구절초가 흐드러진 이 계절이 좋다. 가을밤은 일찍 오고, 창가에 등불을 밝힌 채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을 때, 아아, 이 가을, 내가 살아 있음이 미칠 만큼 좋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다. 아직 가을이 깊어가지는 않지만, 아직도 여름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이젠 정말 가을이다. 그런데 가을의 결실을 거두고 있는가? 지난여름 치열하게 살았고, 그래서 이젠 가을의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여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가을에는 그저 초조함만이 남아있다. 왜 그럴까?
지금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가을 오후다. 나는 카페에 앉아 있는데, 탁자에는 랩톱이 놓여 있다. 나는 랩톱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써나간다. 글쓰기는 일종의 건축술. 글쓰기는 정교한 설계가 있어야 한다. 설계에 따라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뼈대를 세우고 지붕을 올린다. 좋은 설계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더러는 터무니없는 글이 나오는데, 그럴 때는 실망을 하고, 우울한 기분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글쓰기는 시시포스의 노동이거나 헛된 영광을 위한 질주다.
매일 저녁마다 하루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글로 정리하는 행위를 통해 일상을 가꾸는 행위를 하지 못했기에 여름을 지난 지금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이 시시포스의 헛된 노동일지라도 끊임없는 나만의 글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 이렇게 한 해 한 해 보내는 것이 후회스럽다.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혼자 있는 능력이다. 혼자만의 정금正金 같은 고독을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혼자 있을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 불행”에서 벗어난다. 또 다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수록, 즉 인간이 향락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일이 많을수록 그는 점차 행복하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혼자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이 있더라도 가끔은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 혼자 밥 먹고 술 마시는 일을 해보라. 그럴 때 행복이 타자의존적인 사람보다는 혼자 자립해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무리에 기대지 않은 채 혼자 제 삶을 꾸릴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임을 더 실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여름은 지나갔다. 한해를 조금씩 마무리 해야 한다. 마무리는 누구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영역이다. 고독한 여정이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감정마저도 받아들이고, 일상의 허무를 극복해 나가는 외로운 과정이 곧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혼자임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 내게 주어진 혜택이다.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고귀한 자산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혼자서 매일매일 정리해야 한다. 일상을 되새기고, 하루를 반성하고, 감사하고, 내일을 다시 꿈꾸는 루틴이 반복되어야 한다. 글을 쓰는 것. 내 일상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사람과의 관계를 반추해 보는 것. 이것이 나를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인데, 올해의 여름은 참 많이 아쉽다.
새해에는 새로운 해가 떠오른다. 지난 시간과 일들에 대해 충분히 숙고했다면,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들을 반추하고 자기성찰을 마쳤다면, 과거는 과거의 것으로 덮자. 성공 강박에 들려 자신을 실험실의 쥐처럼 저 아수라의 세계로 억지로 내몰지 말자. 욕심이라는 짐을 벗어놓고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며 살아가자. 지난해보다 조금만 더 착한 사람이 되자. 우리는 홀로 타오르는 기쁨! 이 지구에 태어난 기쁨을 오롯하게 누리자. 새 시간의 열림과 더불어 새롭게 일을 시작할 순간에 이르렀다.
그래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나는 이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가을 석양을 마음껏 볼 수 있고, 깊고 푸른 하늘을 느낄 수 있다. 더위에 지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고, 갑자기 내리는 비마저도 감미롭다. 지난 한 해를 후회하는 자유와 남은 한 해를 좀 더 충실하게 보내겠다는 다부진 희망도 가능하다. 즐거움이 가득하다.
우리는 ‘박모薄暮의 시간’이라고 하고,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저녁은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진다. 석양의 빛들이 사물과 풍경을 환하게 물들였는데, 어느새 빛은 증발해 버리고 그 빈자리를 푸른 이내가 밀물로 밀려와 채우는 것이다. 밤나무들과 관목 숲, 너른 저수지, 이마에 닿는 산, 이웃들 집의 지붕들은 푸른 이내에 잠긴다. 푸른 이내가 빛과 어둠 사이의 시간대를 물들이지만 아직 빛은 완전히 탕진되지 않은 채 공중에 희미하다. 푸른 이내는 침묵과 부동不動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빛이다. 그 시각 내 가슴에 사무치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덧없이 지나간 인생의 찰나들,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애인들. 이것들이 새파랗게 살아와서 내 가슴을 들쑤시는 것이다. 나는 살뜰하게 살지 못했다.
여름에 자전거로 새벽에 출근할 때 바라보는 새벽 하늘이 좋다면, 가을에는 저녁에 퇴근할 때의 석양이 최고다. 석양을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짧은 시간에 사라지는 노을이 아쉬우면서도 사무치게 좋다. 마음은 쓸쓸함과 아쉬움이 깔려있지만, 그 시간들이 나와 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었다.
가장 행복한 술은 낮술이다. 한낮의 목욕탕에서 땀을 흘리고 나왔으니, 햇살 아래 낮술 한잔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친애하는 만화가이자 술꾼께서는 한낮, 목욕탕에 다녀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맥주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술꾼이라면 응당 목욕을 하고 난 뒤 차가운 황금빛 맥주 한잔의 유혹에 기꺼이 빠지리라. 맥주 한 모금을 달라고 세포들이 아우성칠 때, 인생 만사가 흔쾌하게 용납되는 그 찰나 목구멍으로 넘기는 맥주 첫 모금이 어찌 맛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욕의 느긋한 기쁨과 술의 기적에 기대어 도취와 망아의 무릉도원을 잠시 거닐다 돌아오련다.
술을 끊은 지 벌써 7년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미치도록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35년 전 한여름 오후에 후배와 농구를 마치고, 샤워 후에 바둑판을 앞에 놓고 각각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천천히 한수한수 바둑을 두었다. 그때의 시원한 맥주, 반지하의 서늘한 마룻바닥, 한수한수 채워지는 바둑판과 몰입하는 즐거운 시간, 좋아하는 후배... 나도 그렇게 몇 번 무릉도원에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풀장을 나와 빛이 번져오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가슴은 환희로 벅찼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여행이 느른하고 아등바등하는 삶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약동하는 삶으로 도약하는 일이라는 것을. 시궁창에서 별로 뛰어오르는 도약! 나는 사는 게 밋밋하고 시들시들해질 때면 어김없이 여권을 챙기고 여행 가방을 꾸린다. 사는 게 권태로운가? 여행을 떠나라! 그곳이 어디든 지금 여기가 아닌 낯선 곳으로!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든, 유럽으로 떠나는 여행이든 낯선 곳으로 가도 좋고, 오히려 낯익은 오래된, 잊힌 시공간으로 가도 좋겠다. 어디는 지금의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 다른 감각으로 가슴이 벅차고, 긴장되고, 감정이 증폭되면 좋겠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썼다. 시궁창에 있으면서 별을 바라보는 게 사람이다. 꿈과 갈망을 포기하는 순간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시궁창 같은 나락에 지나지 않는다. 꿈과 갈망을 지닌 존재들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10여 년 전 여름날 새벽, 중남미 여행 중 멕시코시티의 한 호텔 옥외 풀장에서 수영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이 터올 무렵 텅 빈 풀장에서 혼자 기분 좋게 수영을 했다. 풀장의 물은 차가웠는데, 나는 물을 가르고 꽤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몸이 차츰 더워지면서 차가운 물의 촉감이 감미로워졌다. 그때 성당 종소리가 뎅뎅 울려오고, 푸른 새벽빛이 펼쳐진 공중으로 비둘기들이 떼 지어 날아올랐다.
이제야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고개를 들면 별을 바라볼 수 있다.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사무실에서 이따금 고객을 들어서 북한산과 도봉산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 산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일을 너무도 열심히 하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일 것이다)
출장을 가서도 거리의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다. 출퇴근을 하면서도 탄천의 풀들과 푸른 하늘, 흰 구름, 석양, 새벽 여명, 소나기와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 무표정 같은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나만의 연속극, 아니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 이 글을 쓰면서, 장석주 작가의 글을 읽으며, 다시 느껴본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글, 그런데 내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지는 글. 이런 글을 남은 평생 쓰고 싶다. 나를 가장 잘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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