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독서

<페스트>를 읽고 코로나를 생각해본다

독수리만세 2020. 6. 21. 11:43

엊그제 저녁 카페에서 옆 테이블의 중년 남녀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교회나 성당에 관련된 모임인 것 같은데 연령대는 60대 정도이고, 10분 정도가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들의 주된 이야기는 코로나였다. 우리나라의 코로나 대응책이 잘 되어있어서,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교민을 후송하는 전세기에서 공간이 남으면 그 나라의 필수인력(우리나라 산업계에 필요한)을 데리고 온다든가 하는 실용적이고 나라의 저력을 보여주는 그런 대화였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단기 성과라고 생각한다.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걷다가 이런 위기에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근데 제일 역점을 두고 있는 검찰개혁과 남북교류에 대해서는 좀 아쉽다. 하지만 원칙론이 끝끝내 힘을 발휘하길 빈다.)  

그런데 코로나가 다시 증가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중국에서 발병 환자가 발견된 이후 우리나라는 1월부터 시작되어 2~3월에 급속도로 증가 후, 지속적 관리 및 간헐적 집단 발병을 통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최근 6월 다시 대도시 중심으로 원인불명의 발병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당국의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장판 지정도서인 <페스트>를 읽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유행은 끝나고 뒷북치는 행위는 아닌가?' 혹은 '현재의 코로나 사태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이 3월이었는데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책과 내가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내 가족과 친구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서 내가 아직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전쟁이 닥치고, 자연재해나, 심각한 전염병으로 나와 가족과 친구들의 삶이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때서야 우리의 만용에 가까운 어리석음을 후회할 것이다. 뭐 나를 비롯하여 아직도 코로나에 대해 둔감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는 하다. 그러기에는 우리나라의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사전에도 현재에도 대비를 너무 잘해주었다.

P054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중략)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우리에게 힘든 시간을 주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거나, 일을 쉬어도 생계에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가 없겠지만, 소규모 자영업자나 임시직 근로자들은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들에게 자가격리와 거리두기 등은 따라 하기 힘든 사회적인 제약이었다. 가족 중 한 명이 확진이 되면, 대다수 같이 확진이 되기도 하고, 최소한 격리가 되면서, 생활유지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격리병동의 시설이나 숫자가 안심할 수준이라는 것이 위안이다.

P086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입원 지시가 내려질 것인데 가난뱅이들에게 입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잘 알았다. "의사들의 실험 재료가 되기는 싫어요"라고 어떤 환자의 아내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환자는 의사들의 실험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고 있었을 뿐이다. 사태에 대비해 세운 대책들이 불충분하다는 것은 보나 마나 아주 빤한 일이었다. '특수 시설을 갖춘' 병실 등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리유는 잘 알고 있었다. 부랴부랴 다른 입원 환자들을 옮긴 다음 창문들을 밀폐하고 주위에 위생 차단선을 쳐놓은 병동 두 개가 고작이었다.

우리나라도 한동안 위험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신의 섭리로 믿고서 방역활동에 대처하지 않은 대구지역의 종교집단도 그렇고, 젊은 우리랑은 상관없다는 의식이 발현된 서울 이태원 클럽의 단기간 대량 감염사태가 있었다. 그리고 작업 환경의 취약성이 드러난 콜센터, 물류센터, 네트워크 마케팅의 집단 감염 또한 있었다. 우리는 전염병을 비롯한 천재지변에 대해 논리적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신의 섭리나, 우연으로 판단하고, '설마 내게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안일한 감정적 대응만을 하기도 하였다.

P294
즉, 자기가 말하는 무조건 복종이라는 덕성은, 보통 해석하듯 좁은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되며, 그것은 속된 체념도 아니고 까다로운 겸손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굴종이지만, 굴종하는 사람 스스로가 동의하는 굴종이다. 과연 어린애의 고통은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굴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고통을 감수하고 그 속에 몰입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파늘루는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어쨌든 신이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뮈의 <페스트>는 이런 사회적인 흐름에 대해서만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 우리 개인들이 어떻게 삶을 받아들이고, 고통에 대처하는지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최대한 유지하였다. 의사 리유의 입장에서 즉 제3의 관점에서 쓰고 있다는 형식을 취했다. 그것이 내게는 더욱 신뢰가 가는 글이었다. 감정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는 글이었지만, 책을 읽는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인생이라 것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불교의 이야기도 있지만, 페스트로 인하여 그랑 시민들의 삶은 조금씩 죽음과 방역조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강제 격리로 인해 가족 간 유대의 힘이 깨지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무력해지고, 행정조치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개인들의 생각마저 둔감해지는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그런 상황인데 그들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P097
그러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별거 생활이 끝날 줄 모른 채 연장되면서부터 그들은, 서로 떨어져선 살 수 없으며, 백일하에 문득 드러난 그 진실에 비긴다면 페스트 같은 것은 하찮은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예외였다. 대부분의 경우, 별거 상태는 분명히 그 전염병이 사라져야 비로소 끝날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전체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던 감정, 더구나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감정(오랑 시민들은, 이미 말한 바 있듯이 단순한 정열의 소유자들이다)이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P236
즉,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나타나는 생이별의 감정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P240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것은 결국 그들이 지닌 가장 개인적인 것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페스트의 초기에 그들은 남이 보면 하등의 존재 가치가 없지만 자신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이 너무나 많은 데 놀랐고, 거기에서 개인 생활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와 반대로 남들이 흥미를 보이는 것밖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고 일반적인 관념만을 품었으며, 사랑조차도 그들에게는 가장 추상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사회적 연대를 시도하는 리유와 친구들은 내게 희망을 갖게 하였다. 특히 랑베르는 집요하게 탈출을 하려고 노력했고, 마지막에 결정적 기회가 있었고, 진심 어린 탈출 권유도 있었지만 리유의 보건대에 합류하였다. 그런 실질적인 연대의 힘과 작은 영웅적 활동들이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P172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중략)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P215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제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품을 수 없다면 나는 그 인간에 대해서 흥미가 없습니다."

P215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그러나 리유는 페스트와의 투쟁을 이겨내지만, 마지막에 절친이 된 동료 타루를 결국 병으로 잃게 된다. 그리고 삶의 희망인 아내도 죽고 만다. 리유의 감정은 표현이 잘 안되지만, 어머니의 행동을 통해서 리유의 심정이 표현된다. 페스트라는 거대한 운명앞에서 어쩔수 없는 절망이었다. 우리가 갖고자 하는 행복은 모래처럼 결국 움켜준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간다. 그 슬픔은 그대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P164
어머니는 집안일을 다 끝내면 바로 거기서 하루해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포개어 무릎에 얹고 기다렸다. 리유는 과연 어머니가 기다리는 것이 아들인 자기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가 나타나면 어머니의 얼굴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었다. 고달픈 일생이 그녀의 얼굴에 침묵으로 새겨 놓은 그 모든 것이, 그때면 생기를 띠는 듯싶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침묵에 잠기는 것이었다.

P380
리유의 어머니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몹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똑같은 아픔이었다.

이 책은 <이방인>처럼 다 읽고 나면 답답하지만, 우리에게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개인적인 삶의 의미, 가족과 친구들이 왜 소중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 사회에 대해 올바른 목소리와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는 듯하다. 젊은 시절 내내 전쟁과 정치적 혼돈의 유럽 사회를 겪으며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알려온 카뮈의 삶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내가 살아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를 찾아보고, 평소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작은 친절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사회에서 용기를 내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숙제를 받게 된다. 한두 가지 생각나면서 실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걸음만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