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독서

시를 쉽게 읽을 수 있을까?

독수리만세 2021. 12. 5. 13:0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읽고 나서

작년까지 3년 정도 점심시간에 강남역을 운동삼아 걸었었다. 역삼역-강남역-신논현역-언주역을 지나쳐서 다시 사무실로 가면 4킬로 정도 걸었다. 1시간 안에 식사까지 해야 하니까 걸음은 빨라져야 했다. (여름에는 더워서 많이 힘들었다)

그것이 반복되니까 여유가 생기고 점점 주변의 풍광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상점들의 전시품이 바뀌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오히려 마지막으로 바뀌는 것은 나무들의 옷차림이었다. 

삼정호텔 가로수길 사계절

그런 변화들을 가끔 사진으로 찍어서 온라인 친구들, 가족들, 친구들과 공유했었다. 내 주변에는 한낮의 하늘, 사람들, 나무들을 미쳐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전에 그렇게 살았으니..)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들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현판 글귀였다. 강남 교보타워에서 계절별로 3개월에 한 번씩 새롭게 내걸었던 현판이다. (처음에는 1개월마다 바뀌는 줄 알고 화내면서 기다렸다)

강남역 교보타워 글판 사진 (2020년 여름, 2019년 가을)

그냥 '참 좋다' 라고 생각했던 교보문고 글판의 글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지난주에 알게 되었다. 양재나비 독서모임 이번 주 지정도서였고, 그전 올해 여름에 박순* 회장님이 적극 추천했던 책이었다.

시집과 수필류는 실제로 읽으면 아주 좋지만, 평소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자꾸 실용서로 손이 간다. 하지만 이번 주 의무 필독도서이니 시간 내어 읽었고, 마음의 평안과 감동이 느껴졌다.

1991년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로 시작했던 글판은 2021년 겨울판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다" 로 약 103개의 글판이 걸렸었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느낀 점은 '감동이 쉽게 온다'는 것이었다. 간판 같은 역할의 글판이기에 35자 내외로 내용과 느낌을 전하려니 시가 많이 선택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들도 많다. 안도현의 <연탄>,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도종환의 <접시꽃> 등이 있다면 나태주의 <들꽃>, 장석주의 <대추 한 알> 등은 광화문 글판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시라고 볼 수 있다.

내게는 책의 글들중에서 3가지 대상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오랜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다독이며, 기운 내라고 이야기 주는 것 같았다. 

내 친구들 중에는 올해말 최고 임원으로 승진한 친구도 있고, 퇴임한 임원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원들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이젠 퇴사를 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몇 년 사이로 우리들은 모두 은퇴를 할 것이다.

올해는 만나지도 못했는데, 며칠전 코로나로 악화로 인한 방역대책 강화 방안이 발표되었다. 그로 인해 친구들과 연말 모임이 취소되었다. 얼굴을 못 보는 그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글이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풍경 달다> - 정호승

그리고 다른 친구들보다 몇 년 일찍 퇴임하는 친구, 앞으로도 퇴직할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기나긴 인생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그저 오랜만에 우산 없이 봄비 맞는 것 같은 느낌으로 지내자고 말하고 싶다.

얼굴 좀 펴게나
올빼미여,
이건 봄비가 아닌가
<한 줄도 너무 길다> - 고바야시 잇사

가족들에게(특히 두 딸들) 2년째 아침마다 쪽지를 보내고 있다. 빼먹는 날도 있지만 대화시간이 부족한 바쁜 생활 속에 아빠도 잘 지내고 있다는 연락 같은 것이다.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해서 내 마음과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20211203 금 아빠문자 #576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단풍 드는 날> 도종환

아빠의 사족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내려놓는 것
이것이 우리를 빛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한참 즐겁게 지내야 할 20대 초반을 오랫동안 수험생활을 하고 있는 두 딸들에게 힘을 주고 주고 싶었다. 무엇도 도움이 쉽지 않지만, 영양제와 각성제를 동시에 주고 싶은 마음인데 그런 바람들이 보였다.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들꽃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얼음새 꽃> 곽효환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봄
<봄> 이성부

푸른 바다에는 고래가 있어야지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그리고 마지막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들도 있었다. 무언가 열심히 살아보고자 해도, 목표를 잡기도 어렵고, 설사 목표가 있어도 불안한 심정이었기에 스스로 위안이 필요했다.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과 그저 순간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리고 언제든 항상 새로운 출발, 새벽 운동 같은 어제와의 결별, 하루의 리셋, 굿 스타트를 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자주 넘어지고, 길을 잃었고, 후회를 하는 평범한 삶이지만 그래도 아침에는 언제나 새롭게 다짐한다.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아침> 정현종

이 책을 새롭게 시간을 내어 읽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더 급한 책이 있고, 더 많은 정보가 있는 책이 밀려오지만, 한번 여유를 만들어서 읽고 느끼고 다시 신발끈 동여매고 앞으로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